▲ @일러스트레이터 배정식

저녁 7시만 돼도 깜깜해진 동네 올레길은 외로이 빛을 발하는 가로등과 불 꺼진 집안의 TV 화면으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불빛만이 밤을 맞이하는 우리 동네의 평소 풍경입니다.

해가 지면 인기척조차 없던 동네에 요 며칠은 두런두런 사람들의 말소리, 이집 저집에서 풍기는 고소한 기름 냄새와 온 동네 가득 채우는 숯불에 올려진 고기 냄새 그리고 늘 텅 비어있던 집 앞 어귀 공터에는 차들이 가득합니다.

‘명절은 명절이구나’ 생각하며 가족이 함께 모인 저녁나절의 풍경을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으며 따뜻함을 느껴봅니다. 그리고 한편으론 아련함이 밀려옵니다.

“명절인데 떡국은 끓여 먹었니?” 수화기 너머 친정엄마의 그리움이 전해옵니다.

“할머니가 얼마 전에 핸드폰을 바꾸셨는데, 예전 핸드폰에 있던 보윤이 애기 때 사진이 사라져버려 속상해하시며 눈물을 보이시더라. 애기 사진이라도 봐야 하는데 하시면서.”

필자에게는 아흔이 되신 할머니가 있습니다. 유년시절 필자는 증조모, 조부모, 부모님과 함께 4대가 함께 살았습니다. 필자의 할머니는 올해 초등학교 6학년이 되는 필자의 딸을 유난히 아끼십니다.

벌써 10년 전쯤 이야기입니다. 일을 가야 하는 손녀의 아기를 봐주러 손주 사위와 손녀, 증손녀와 함께 1년 정도 생활을 하셨습니다. 맞벌이하며 먹고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고향을 자주 찾지 못하는 데도 꼬물꼬물 한참 이쁠 때 함께 살았던 증손녀에 대한 애틋함은 옅어지지 않으신가 봅니다.

필자는 이젠 고향에서 살았던 세월이나 타지에서 산 세월이나 비슷할 만큼 나이가 들었습니다. 훌쩍 커버린 필자의 딸을 여전히 아기처럼 여기시고 마음 쓰시는 아흔의 할머니를 명절에도 찾아뵙지 못하는 불혹의 손녀입니다. 일이 바쁠 땐 시간이 없고, 시간이 있을 땐 돈이 없다는 핑계로 친정 나들이하는 발걸음이 선뜻 떨어지지 않습니다.

불혹의 나이임에도 제 입장이 먼저인 손녀입니다. ‘요즘은 평균 수명이 길어져, 철도 늦게 드는 거다’며 누군가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아마도 조만간 고향을 방문하지 못할 것입니다. 딸 아이의 아기 때 사진이라도 찾아 할머니께 전해드려야겠습니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