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러스트 배정식

예로부터 수선화는 선비들의 꽃이었다. 특히, 내륙에서는 좀체 보기 힘들었는데 제주에는 비교적 흔한 꽃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선비들은 제주에서 수선화를 보고 그 고아한 자태를 시로 담고 했다.

추사 김정희는 제주 수선화를 사랑한 선비로 유명하다. 추사는 24세에 아버지를 따라 연경(베이징)에 갔다가 수선화를 처음 보고 꽃의 아름다움에 빠졌다. 나이가 들어 43세 때에는 평안감사였던 아버지 김노경을 뵙기 위해 평양에 들렀다. 그런데 중국에 돌아온 사신이 아버지에게 선물한 수선화를 보고 추사는 이 꽃을 고려청자에 심은 후 다산 정약용 선생에게 선물했다.

다산은 추사의 선물에 대해 시로 화답했다. 시의 원제목은 <수선화>이고 부제는 “늦가을에 벗 김정희가 향각에서 수선화 한 그루를 부쳐 왔는데 그 화분은 고려청자였다(秋晚 金友喜香閣 寄水仙花一本 其盆高麗古器也)”로 되어 있다.

得未曾有爭喧譁 일찍이 없었던 것 얻었기에 다투어 떠들썩한다.

穉孫初擬薤勁拔 어린 손자는 처음으로 억센 부추에 비유하더니

小婢翻驚蒜早芽 어린 여종은 도리어 일찍 싹튼 마늘 싹이라며 놀란다.

다산 시의 일부인데, 당시 수선화가 얼마나 귀했는지, 선비들이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 알 수 있다.

추사와 다산이 수선화를 주고받은 지 10년 쯤 후에 추사가 제주에 유배됐다. 그런데 제주 도처에 널려 있는 수선화를 보고 추사는 친구 권돈인에게 편지를 썼다. “산과 들, 밭둑 사이가 마치 흰 구름이 질펀하게 깔려 있는 듯, 흰 눈이 광대하게 쌓여 있는 듯합니다.”

그런데 너무 흔해서 농부들이 소와 말 먹이로 쓰기 일쑤였다. 농사에 방해가 된다고 잡초취급을 한다. 추사는 대정의 농부들이 수선화를 함부로 대하는 것을 보고 “꽃이 제자리를 얻지 못함이 안쓰럽다”고 한탄했다고 하니 버려진 자신의 처지와 같다고 느꼈기 때문일 게다.

추사가 적소에서의 수선화를 벗삼아 외로움을 달랐다. 그는 시 ‘수선화(水仙花)’에서 이 꽃을 ‘해탈신선’이라고 극찬했다.

一點冬心朶朶圓 날씨는 차가워도 꽃봉오리 둥글둥글

品於幽澹冷雋邊 그윽하고 담백하여 감상하기 그만이다

梅高猶未離庭砌 매화나무 고고해도 뜰 밖 나기 어렵지만

淸水眞看解脫仙 맑은 물에 핀 수선화 해탈신선 너로구나

제주 도처에 수선화가 피었다. 배정식 화가의 손을 거쳐 서귀포신문 지면에도 꽃이 피었다.

**이 기사(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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