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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년 봄, ‘제주추사관’ 유감추사관 개관 36년, 이름 바로잡기[正名]가 필요하다
서귀포신문 | 승인 2020.03.25 11:26
소암선생 예서체 편액현판 '추사관'

오랜만에 대정골을 찾았다. ‘추사관秋史館’을 에운 성담 밑으로 수선화가 여느 해 봄보다 더 초라하게 지고 있었다.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 이른바 ‘제주추사관’으로 가다보면 세 번의 다른 이름을 만날 수 있다. ‘서귀포 김정희 유배지’라는 교통안내 표지판, 추사의 해천일립상(海天一笠像) 이미지와 함께 세로로 세워진 ‘제주추사관’ 간판, 그리고 예서체로 건물 벽에 붙여진 대리석 현판 ‘추사관’ 등이다.

1840년 10월 1일, 추사 김정희(1786~1856)는 윤상도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골로 유배됐으니, 올해로 꼭 180년이 된다. 서귀포시 법정문화도시 선정과 관련하여 추사유배이야기를 지역의 시각으로 살펴보자는 서귀포신문의 원고의뢰를 받아 놓고, 며칠을 고심했다. 이 연재를 시작하면서 우선 추사관의 이름에 얽힌 지난 일부터 풀어나가야 될 듯하다. 지금은 영문도 모른 채 버려져 잊혀져가는, ‘추사관’이라는 이름에 관한 이야기이다. 여기에도 삼국지 못지않은 삼고초려(三顧草廬)의 훈훈한 이야기가 전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많지 않다.

필자가 소암 현중화(1907~1997)문하에서 말석을 어지럽힐 때, 소암 서예가문의 정통가풍을 올바로 이으시고 한학(漢學)과 향토사학에 조예가 깊으셨던 소농 오문복 선생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소개하려고 한다. 1980년도 초 당시 제주예총회장직을 맡아 특유의 호방함과 포용력으로 제주문화예술계를 이끌던 호암 양창보(1937~2007) 화백과 당대 한국서단의 거벽(巨擘)으로 고향 서귀포에서 먹고, 자고, 쓰는 일로 유유자적하시던 서예가 소암 현중화 선생에 관한 일화이다.

호암 양창보 회장은 당시 대정 추사적거지 복원사업을 추진하면서 서울대 미대동문 등 경향각지의 서예계·미술계 인사를 두루 만나고 다닐 때 난처한 일이 있었다는데, 바로 추사유물전시관이 복원되면 ‘현판을 써주겠노라’는 자칭 타칭 대가들의 청탁이었다고 한다. 도움을 주시는 분들의 호의를 거절하긴 쉽지 않았다면서, 심지어 현판을 쓰게 해주면 별도의 찬조금을 더 내겠노라는 분도 있어서 여간 난감한 일이 아니었다고 하였다. 당시 개인적으론 서로 일면식도 없었으나 호암 화백의 심중에는 이미 서귀포의 소암 선생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제주추사관’ 간판(좌)와 추사김선생적려유허비(우)

추사유물전시관이 완공될 즈음에 호암 화백은 소암 선생의 거처인 서귀포 조범산방(眺帆山房)을 찾았다. 서로 수인사를 마치고 호암 화백은 방문하게 된 용건을 말씀드렸다. 소암 선생은 서울의 대가들도 많을 터, 나 같은 촌 노인이 쓸 형편이 아니라했다. 호암 화백 역시 소암 선생께서 처음부터 흔쾌히 응하리라 예견하진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옛 어른들은 남의 부탁을 받으면 의례히 한 번쯤 거절하는 것을 예사(禮辭)로 여겼던 터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후일을 기약하고 첫 만남의 아쉬움을 남기고 물러나왔다. 일주일 쯤 후, 호암 화백은 다시 조범산방을 찾았다.

 

호암 : “선생님 잘 지내셨습니까? 며칠을 다시 생각해보아도 우리 고장에 세워지는 기념관인 만큼 지역 예술인들의 자존과 자부심을 위해서라도 선생님의 글씨가 꼭 필요합니다.”

소암 : “지난 번 말씀드렸다시피 저 같은 향리에 사는 사람이 추사 같은 큰 어른의 이름을 더럽힐 수 없습니다. 정히 그러시면 추사선생의 글씨를 집자하는 것도 한 방법일 겁니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라 했던가. 고사(固辭)였다. 소암 선생의 겸손에는 진정성이 묻어있었다. 하는 수 없이 이번에도 빈손으로 물러나왔다. 소암 선생의 인품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던 터라 실망하기에 아직 일렀다. 며칠 뒤 호암 화백은 유비가 제갈량을 찾던 삼고초려의 심정으로 다시 서귀포 조범산방으로 향했다. 이번에 종사(終辭, 끝내 사양함)를 한다면 하는 수없이 추사체로 집자(集字)해서 현판을 걸 심산이었다. 세 번째 만남이다. 두 어른은 서로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았다. 이윽고 소암 선생이 호암 화백에게 넌지시 봉투하나를 건넸다. 그 봉투 안에는 ‘추사관(秋史館)’이라는 예서체 편액이 들어있었다. 1984년 11월 26일, 추사유물전시관은 이렇게 ‘추사관’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향해 문을 열었다.

돌아 나오는 길, ‘제주추사관’이라는 간판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공자(孔子)와 제자 자로(子路)의 문답이 떠올랐다. 위령공이 선생님을 대우하여 정치를 맡긴다면 무엇을 가장 먼저 하시겠냐는 제자의 물음에 스승은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겠다[必也正名乎]”고 하였다. 이른 바 정명(正名)이라는 것이다. 이름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다. 그릇이 바르지 않은데, 어찌 물건이 가지런히 담기기를 바랄 것인가. 우리 고장 선학들의 노고와 아름다운 일화가 얽힌 ‘추사관’이라는 이름과 사연이 다시 세상의 빛을 보기를 소망한다. 그러고 보니 ‘추사관’을 개관한 지도 어언 36년이나 되었다.

오창림 서예가 · 제주대 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물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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