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특집 : 기억과 공감, 서귀포시 미래문화자산을 찾아라 ⑨] 서귀포에 근대 요식업 태동

덕성원. 앞에 있는 건물은 왕 씨 가족이 처음에 요식업을 했던 곳이다. 이후 뒤에 건물을 신축해 이주했다.(사진=장태욱 기자)
덕성원. 앞에 있는 건물은 왕 씨 가족이 처음에 요식업을 했던 곳이다. 이후 뒤에 건물을 신축해 이주했다.(사진=장태욱 기자)

서귀포에 근대적 의미의 요식업이 시작된 것은 1920년대로 알려졌다. 일본인들이 들어와 축항공사를 하면서, 서귀포시가 근대도시로 태동하던 즈음이다.

서귀포시문화도시센터가 2019년 문화도시조성사업으로 기획한 「서귀포시 근대역사문화 아카이브 Ⅰ」은 1870~1950년까지 서귀동 솔동산 마을의 변화상을 담았다. 기록에는 ‘요시노 요정’과, ‘태평관’, ‘덕성원’ 등의 이름이 등장한다.

요시노 요정이라는 이름은 조선총독부가 1928년 발간한 『조선』160호에 「제주도 기행」이라는 소제목에 등장한다. 당시 조선총독북 내무국 토목기사였던 가지야마 아사지로는 1928년 5월 제주항 축항공사를 시찰한 후 제주도를 둘러보고 기행문을 남겼다.

가지야마 아사지로는 서귀포항과 둘러보고 ‘항구 앞에 새섬이 있고 이것이 항구 앞면의 방파제가 되는지 서쪽부터 항구와 이 섬을 돌담으로 연결하고 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해안에 있는 요시노라는 요리점에서 동북쪽으로 꺾어 부락으로 들어섰다’라고 했다.

제주국제대 김은희 교수는 『근대 제주 일본 거류민 연구』(경인문화사, 2022)에 「전라남도 사정지(1930)」 내용을 인용하며 요시노라는 요리점을 운영한 이는 일본 구마모토현 출신 요시노 도시타로라고 기록했다. 그는 목포에서 여관을 운영하는 숙부를 따라 조선에 들어왔는데, 1925년 서귀포로 와서 가옥을 짓고 요시노라는 요정을 개업했다.

요시노 요정은 요식업계에선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는데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다. 기행문에 요시노 동북쪽으로 꺾어 부락으로 들어섰다는 대목에서 요시노 요정이 현재 카페 ‘하얀성’ 주변에 있지 않았을까 짐작할 뿐이다.

태평관이 있던 곳 주변에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곳 주민들에게 고급 요리점에 대해 물었는데, 아는 이가 없었다.(사진=장태욱 기자)
태평관이 있던 곳 주변에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섰다. 이곳 주민들에게 고급 요리점에 대해 물었는데, 아는 이가 없었다.(사진=장태욱 기자)

태평관은 해방 전·후 서귀포 관내 유지들이 드나들던 고급 요릿집이라고 간단하게 소개됐다. 과거 태평관이 있었다는 곳을 찾아갔더니,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들어서 있었다. 운영자나 운영 연도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으로 보아, 태평관은 짧은 기간 운용됐던 것으로 보인다.

덕성원은 서귀포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음식점이다. 서귀포에 중화요리를 최초로 소개했을 뿐만 아니라, 요리의 수준을 크게 높였다는 평을 받는다. 제주도 화교협회장을 지낸 故 왕정춘(王亭春) 씨가 창업했는데, 2대 왕복안 씨(王福安, 86)에 이어 3대 왕옥해 씨(王玉海, 53) 등이 가업을 이어오고 있다.

왕정춘 씨는 원래 중국 산동반도에 농사를 짓던 사람이다. 무술에 능해서 주변에서도 완력을 쓰는 사람으로 통했다. 그런데 중국 혁명 과정에서 현지에 오래 살기 어렵게 됐고, 친구 6명과 함께 1930년대 중반에 인천을 통해 조선으로 들어왔다.

왕 씨 일행은 인천에서 군산을 거쳐 제주도에 왔는데, 조선의 그 어느 곳도 가난하고 먹을 게 귀했다. 같이 입국한 친구 3명은 중국으로 돌아갔고, 왕정춘 씨를 포함해 4명은 제주에 정착했다.

왕정춘 씨는 처음에 구좌읍 김녕리에 정착해 음식점을 운영했다. 이후 한림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통조림공장에서 책임자로 일하다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에는 제주시 관덕정 주변으로 이주해 식당을 열었는데, 장사가 별로 신통치 않았다.

왕복안 씨는 “밤마다 아버지 식당에 화교들이 모였다. 아버지는 화교들에게 먹을 것을 나눠주고 같이 술을 마시고 놀았다. 장사를 제대로 되지 않아, 내가 아버지에게 서귀포로 가서 살자고 했다”라고 말했다. 당시 제주도에 사는 화교는 약 500명이었는데 왕정춘 씨는 화교회장도 맡았기에 화교들에게는 ‘비빌 언덕’과 같았다.

왕정춘 씨는 결국 아들의 설득에 못 이겨 서귀포로 이주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즈음이었다. 처음에는 호떡을 팔았는데 육군 제1훈련소가 1951년 1월 모슬포로 이전하면서 사업은 호황을 누렸다. 미군이 왕가네 호떡가게에 밀가루를 공급했고, 이곳에서 빵을 구매했다. 밀가루가 귀하던 시절인데, 왕가네는 미군이 싣고 온 밀가루를 구입한 후 그걸 재료로 도너츠를 만들어 미군에 납품했다. 땅 짚고 헤엄치는 격으로 돈을 벌었다.

이후에는 같은 자리에 호떡가게를 접고 중화요리 식당을 차렸다. 식당 앞에는 일주도로를 운행하던 시외버스 종점이, 인근에는 서귀면사무소가 있었다. 가게 주변은 늘 사람이 붐볐고, 식당은 기대이상으로 호황을 누렸다.

대만 정부가 왕정춘 씨에게 전달한 감사장. 덕성원에 게시됐다.(사진=장태욱 기자)
대만 정부가 왕정춘 씨에게 전달한 감사장. 덕성원에 게시됐다.(사진=장태욱 기자)

왕복안 씨는 “처음에는 자장면과 짬뽕, 볶음밥만 팔았다. 당시 한 그릇 값이 20~30원이었는데, 곰탕 한 그릇과 값이 같았다. 그런데 곰탕 갈수록 가격이 오르는데 자장면은 잘 오르지 않더라”라고 말했다.

왕정춘 씨는 1958년에 며느리 명의로 땅을 사들였다. 화교는 땅을 소유할 수 없도록 한 법률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1964년에는 목재로 집을 짓고 장사를 이어갔다.

왕복안 씨는 “아버지는 원래 요리를 하는 분이 아니었지만, 한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요리를 익혔다. 나도 화교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가업을 잇기 위해 시키지 않아도 요리를 배웠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내가 가업을 이은 후에는 간짜장과 팔보채 등 메뉴를 추가했다. 혼자 연습하며 메뉴를 더했는데, 굴짬뽕과 게짬뽕은 한국에서도 내가 제일 먼저 시작했다”라고 말했다.

덕성원 본점은 창업자 왕정춘 씨에 이어 아들 왕복안 씨를 거쳐 지금은 장손 왕옥해 씨가 가업을 잇고 있다. 그리고 왕옥해 씨의 동생인 왕옥광 씨와 왕옥림 씨는 각각 2호점(중문)과 3호점(제주시 아라동)을 개업해 운영한다. 이들은 모두 대학에서 공부하고 직장도 다녔는데, 결국은 요식업계로 돌아왔다.

왕복안 씨는 화교학교에서 농구를 배우고 중문중학교에서 학생들에게 농구를 지도했고 서귀포 산악회에 가입해 대만의 산악회와의 교류를 주선하기도 했다. 중국의 배가 사고를 당하거나 태풍을 피해 서귀포항에 입항하면 선원들을 덕성원으로 데리고 와 음식과 잠자리를 대접했다. 덕성원에는 대만 정부와 한국 정부가 왕 씨의 공을 인정해 준 감사장이 여러 장 게시됐다.

요시노 요정과 태평관, 덕성원 등 요식업소 3곳은 서귀포를 대표하는 근대유산이다. 그 가운데 요시노 요정은 장소가 확인되지 않았는데, 법원의 폐쇄등기부를 확인하면 위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태평관은 위치를 알 수 있는데, 지금은 그 주변이 단독주택과 아파트 등이 들어섰다. 덕성원은 창업자의 후손이 가업을 잇고 있어서 그 70여 년 역사는 물론이고 화교사회의 공동체 문화까지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우선 덕성원을 서귀포 미래문화자산에 선정하는 게 바람직하다. 나머지 두 개의 음식점도 자료를 더 조사해서 역사·문화자원으로 활용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서귀포의 근대 유산이 무관심 속에 가치가 묻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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