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장태욱 편집국장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한국과 미국 정부 사이에는 미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미국 중앙정보국(CIA)가 작성한 1961년 5월 31일 자 문서에는 박정희 군부가 폐쇄성과 경험 부족으로 한국 내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 것이라는 전망이 들어 있다. 그리고 한국은 외국의 원조와 기술 자문이 절실한데, 군부는 폐쇄성 때문에 그런 도움을 받을지조차 불확실하다는 내용이 있다.

그런데 박정희 의장은 1961년 11월 11일, 방미 길에 올랐다. 미국으로부터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을 받고, 국방·경제적 원조를 얻는 게 방미의 목표였다.

이영희 선생은 당시 합통통신 기자로 동아일보의 권오기, 조선일보의 김인호, 동양통신이 심연섭 등과 함께 외교 과정을 취재했다.

11월 13일 박정희·케네디 회담이 이뤄졌다. 회담이 끝나자 백악관 공보비서가 홍보용으로 공동성명 내용을 브리핑했는데, 크게는 ▲‘케네디가 박정희에게 민정 이양을 요구했고 박정희가 이를 수용하기로 했다’ ▲‘박정희는 케네디에게 정권에 대한 지지, 한미방위조약 이행, 군사 원조 유지 등을 약속받았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원조의 방법 등 구체적인 내용은 없었다. 한국의 대부분 기자는 달콤한 브리핑 내용을 믿고 방미 성과를 열을 올리며 홍보했다. 23억 달러 원조는 물론이고, 전투기의 종류와 대수까지 쓰는 기자도 있었다.

그런데 이영희 기자는 공동성명이 내용이 발표되자 워싱턴 포스트로 달려갔다. 이영희 기자는 1959년 워싱턴 포스트와 인연을 맺은 워싱턴 포스트 한국 특파원 역할을 했는데, 그 인연을 박정희·케네디 정상회담 보도에 활용하기로 했다.

이영희 기자는 워싱턴 포스트의 주선으로 이번 회담을 준비한 고위관리를 소개받았다. 그리고 관료의 사무실을 방문해 1시간가량 얘기를 들었다. 그리고 미국 방문외교의 성과를 극찬했던 경쟁 언론사와는 전혀 다른 기사를 썼다. 기사는 특종이었는데, 그 일부분이다.

‘미국의 고위 경제전문가는 15일 본기자에게 미국으로서 5개년계획에 대한 한국 측의 요구는 환상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박 의장이 그 계획의 재원으로 23억 불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 케네디 대통령은 박 의장에게 그 같은 거액의 재정지원은 행정부 단독의 결정사항이 아님을 설명했다. 케네디 대통령은 미국 의회가 한국 신정부의 결의와 진지함을 이해하고 있지만, 과거의 불미한 기억들을 완전히 잊어버린 상태가 아님을 박의장에 강조했다.’

그리고 며칠 후 박정희를 수행했던 김재춘 합동수사본부장이 “여기까지 와서 좋지 않은 기사를 내보내는 사람은 잘 기억해두겠습니다”라고 엄포를 놓았다. 박정희 의장은 귀국 후 수행원과 수행기자를 청와대로 초청해 파티를 열었는데, 이영희 기자는 초청하지 않았다. 박정희 군부가 가진 ‘그릇의 크기’를 보여주는 단면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11일부터 16일까지 일정으로 동남아를 순방하고 돌아왔다. 출발 전부터 MBC 기자를 전세기에 태우지 않겠다고 하더니, 회담 현장에 기자의 취재를 제한했다고 한다. 그리고 특정 언론사 기자만 불러서 따로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고 전한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닌 협소한 언론관, 소인배적 자질을 천하에 드러났으니 순방 외교의 결실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취재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기자들, 이들은 뭘 했을까? 윤석열 대통령의 됨됨이를 가까이서 보고 알았다면, 플랜B 플랜C를 갖고 갔어야 하지 않았나? 외교 현장에서 현실의 장벽을 넘어 진실을 발굴하려는 의지가 있었나? 권력과 긴장하는 게 언론의 숙명인데, 언론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모든 언론이 권력에 불평하는 걸 보는 것도 언짢기는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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