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수첩]행복한 교사

9월이다. 밀물처럼 아이들이 달려왔다. 방학동안 텅 비었던 교실을 가득 채우고 삭막했던 나의 마음을 채운다. 쉴 새 없이 재잘대며 졸졸 따라 다니는 아이, 먼 발치에서 정겨운 웃음으로 화답하는 아이, 이름만 불러도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웃음이 절로 나온다.해마다 9월이 되면 교실은 방학 동안의 자유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들떠있게 마련이다. 기본 생활 습관을 다시 가다듬게 하고 학습 방법을 재확인시키느라 분주한 가운데 9월은 정신없이 지나가 버리곤 한다.그러나 올 9월은 여느 해 와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초점을 잃고 망상에 빠져 하루를 소비하던 아이의 눈빛이 9월과 더불어 맑아졌다. 공부시간까지 눈치보며 잡담을 즐기던 아이의 얼굴도 9월과 더불어 진지해졌다. 게임에 빠져 살던 아이도 되살아난 눈빛에 힘을 주며 내 눈 속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두 9월과 함께 다가온 변화들이다. 그 뿐이 아니다. 나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아이들 가슴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나뭇가지에 이는 가을 바람처럼 떨리는 기쁨을 안겨주며 9월은 나에게로 왔다.잔잔한 음성으로 이야기를 해도 새겨 듣는 아이들에게 착하다는 말을 되풀이하며 웃는다. 졸업반 아이들인데도 이렇듯 순수하게 마음을 열고 다가오니 학교 생활이 즐겁다.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가도 교실에서는 웃음이 배어나온다. 교실에서 웃을 수 있는 나야말로 정말 행복한 교사라는 생각을 한다. 보람을 느끼며 교단을 지킬 수 있는 한 교사의 길은 행복하다고 자위한다.1학기 내내 힘들었던 마음의 벽을 부수고 기적처럼 피어난 믿음의 꽃씨는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생각을 해 본다. 늘 믿고 실망하고 또 믿고 실망하고 그래도 포기할 수 없는 아이들 앞에서 수도 없이 했던 말을 기억해 본다. ‘너를 믿는다’는 말. 이 말이 서서히 아이들 마음 속으로 들어가 싹을 틔운 것이라고 생각한다. 방학을 보내면서 아이들은 나의 믿음에 조그마한 확신을 얻은 것 같다. 개학 날 아이들에게 “너희들을 확실히 믿을 수 있다”고 말했을 때 아이들의 눈은 진지했다. 그날 아이들에게 초등학교에서의 마지막 6개월동안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자신의 살아온 길에 대한 기록을 자서전 형식으로 쓰게 하였다. 태어나면서부터 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변화를 기록하되 끝부분에는 2000년 9월에 새로운 마음으로 어떠한 결심을 하였고 20년 후에는 이 세계의 어느 분야에서 어떠한 일을 하며 자신감있게 살아가고 있을 것이라는 말을 쓰도록 하였다. 그날 쓴 자서전을 읽다보니 아이들에 대한 나의 믿음이 강해졌다. 아이들 역시 자신에 대하여 더욱 강한 믿음과 희망을 갖게 된 것 같았다. 그렇게 믿어서 그런지 그 날 이후 아이들이 눈에 띄게 착해졌다.교사의 믿음이 아이들의 가슴 속으로 전달되고 아이들이 자신에 대하여 믿음을 가졌을 때 모든 편견과 오만 그리고 개인주의의 가면을 벗어 던지고 아이들은 아이다와 지는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는 역시 아이임을 이 9월에 확실히 느끼고 있다. 믿음만이 그들을 변화시킨다는 진리를 되새기고 있다.이 9월에 아이들을 믿는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교사이다.박희순/제주교대부속교 교사제229호(2000년 9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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