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팡]‘탱크’같은 여자를 꿈꾸며

사실 나는 여자나 남자의 외모에 그다지 민감한 편이 아니다. 물론 내가 특출한 미모의 소유자가 아니라 일찌감치 그런 쪽의 관심을 차단하고 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는 여자나 남자나 상대방에게 호감을 줄 수 있는 한 두가지 장점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해왔다. 한 술 더 떠서 나는 몸매가 늘씬하고 몸피가 가는 여자보다는 ‘탱크’처럼 생긴 여자가 좋아보인다. 가수 양희은의 지금의 모습이 참 보기 좋다면 내가 별난 취미를 가진 걸까. 아직 큰 아이가 어렸을 적, 포동포동 살이 오른 아기를 힘겹게 안고 다니면서 정말이지 어깨가 떡 벌어지고 살팍한 두 다리를 지닌 아기 엄마들이 부러웠다. 한 팔로 아기를 거뜬히 안아 한쪽 옆구리에 척 올려붙이고 씩씩하게 걸어가는 젊은 여자의 모습은 얼마나 믿음직스럽고 용감해 보이던가. 그러다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아이 키울 때보다 더 ‘탱크’같은 여자가 부러워지기 시작했다. 하루 종일 검질을 매도 지치지 않는 여자, 액비 뿌리는 일쯤이야 남자 없어도 뚝딱 해치우는 여자. 가득찬 밀감 컨테이너쯤이야 아무렇지도 않게 들어 옮길 수 있는 여자가 부러워 죽겠는 거다. 하루 일하고 나면 그 다음날은 맥을 못 추는 내 체력은 아무래도 체격이 받쳐주지 못해 그런 것 같아 어쩔 때는 속이 상하기도 했다. 특히 보통 남자만한 키에 어깨가 벌어진, 당당하기 이를 데 없이 생긴 이웃 마을의 찬이 엄마를 보면 기가 죽을 수밖에 없었다. 일을 얼마나 잘 하는지 남자일 여자 일 가리지 않는데다 아무리 힘든 일을 하고 난 뒷날도 엄살 한번 피우지 않고 아침 일찍 밭에 나가는 그녀의 체력과 체격이 나는 늘 샘이 났다.언젠가 내가 남편에게, 나는 다시 여자로 태어난다면 날씬하고 예쁜 여자보다는 ‘탱크’같이 우람한 여자로 태어나고 싶다며 찬이 엄마가 부럽다고 했더니 남편은 뜻밖의 대답을 들려주었다. 자기도 정말 부러운 사람이 있다면서 이웃 마을의, 힘이 천하장사로 이름난 은주 아빠를 꼽는 거였다. 무거운 물건을 옮기거나 힘을 써야 할 일이 있으면 사람들이 으레 은주 아빠를 부르는데 어찌나 힘이 센지 저 정도면 농사짓는 데 얼마나 좋을까 싶어 부럽기 짝이 없단다. 이제 밀감 수확의 계절. 우리는 또 얼마나 탱크 같은 여자와 천하장사 남자를 부러워하면 이 계절을 보내야 하나. 지난 일요일에는 나무에서 충분히 완숙시킨다며 미뤄두었던 극조생 밀감을 느지막이 땄다. 두 사람의 일손을 빌려 따고 보니 컨테이너로 100개가 조금 넘었다. 따는 일만큼은 나도 이제 3년 경력에 빛나는지라 비교적 수월했지만 실어나르는 게 문제였다. 극조생 밀감밭엔 리어카가 들어올 수 없어 일일이 들어서 차 있는 곳까지 날라야 했다. 절반도 나르기 전에 날은 어두워졌고 뒤늦게 일손을 보태줄 고마운 구원병들이 나타나서야 일을 마칠 수 있었다. 20Kg이 조금 넘는 컨테이너를 두 팔로만 들어올릴 수 없어 허벅지에 대고 날랐더니 내 허벅지는 온통 시퍼런 멍투성이가 되어 버렸다. 이런 판국에 어찌 ‘탱크’같은 여자가 부럽지 않을 수 있겠는가.이제는 나보다 머리통 하나쯤 더 커있는 아들 녀석의 옆구리에 바싹 붙어 고목에 매미 붙듯 매달려 걸을 때만 빼놓고, 주문을 한번 외우고 한바퀴 빙 돌고 나면 ‘탱크’같은 여자로 변신하는 마법은 없는 걸까 환상에 젖어보는 이즈음이다.조선희/「마흔에 밭을 일구다」의 저자, 남제주군 표선면 토산리 제288호(2001년 11월 1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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