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팡]길 위에서 하는 생각

이곳에서 살게 되면서부터 운전은 더 이상 중노동도, 고역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대도시에서야 달리는 시간보다 길에 서 있는 시간이 많다보니 차를 가지고 어디를 가야 한다는 자체가 엄청난 스트레스가 아닐 수 없다. 매연이 심해 차창을 열어놓는 일도 탐탁치 않고 보이는 것이라곤 즐비한 차량뿐이니 대도시에서의 운전은 그야말로 인내력 테스트와 다름없다.하지만 이곳에서는 다르다. 길이 막힐 일도 없거니와 막힌대도 지루할 일이 없다. 날만 좋으면 한라산을 물끄러미 바라봐도 좋고 비라도 오는 날이면 길가 나무에 후두둑 떨어지는 빗물을 느껴도 좋다. 서 있는 곳이 목장 가까이라면 실컷 말 구경을 하면 되고 고개를 들어 나무 한 그루 가득 시커멓게 내려앉은 까마귀떼를 보는 일도 즐겁다. 무엇보다 늘 다른 풍경을 볼 수 있다는 것만큼 행복한 일은 없다. 봄이면 왕벚꽃나무와 싱싱하게 물 오른 삼나무가 보기 좋고 여름이면 지천에 푸르른 이름모를 풀과 넝쿨과 나무가 다 좋다. 가을 풍경의 으뜸은 억새꽃이다. 남들은 억새꽃 잔치다 뭐다 해서 일부러 찾아다니기도 하는 모양이지만 억새꽃은 우리집 올래만 벗어나면 사방천지에 깔려있다. 멀리서 보면 분홍빛 같기도 하고 보랏빛 같기도 한 것이 하도 신기하고 예뻐서 가까이 다가가 보면 정말 분홍색과 보라색이 감도는 꽃술이 삘기꽃 모양으로 피어있다. 찬바람이 불어와 꽃 빛깔을 잃어도 억새는 억새다. 누워서 마구 뒹굴어도 될 것처럼 푸근하게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억새를 보면서 나는 늘 있는 듯 없는 듯 생명을 이어가는, 보잘 것 없는 이 세상의 잡초에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하지만 이처럼 변화무쌍하고 아름다운 눈요기를 놓치지 않으려면 길을 잘 골라서 운전을 해야 한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서 제주시에 이르는 길은 대여섯 가지. 청명한 가을에야 굳이 피해야 할 길은 없다. 가시리를 지나 정석비행장 길로 달리다가 교래 쪽으로 방향을 틀어 오일륙도로를 만나 제주시로 들어가는 길은 우선 평탄하지가 않아 재미있다.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길이라는 뜻이다. 오일륙도로를 만나기 직전 2킬로미터쯤 이어지는 삼나무 길은 너무도 아름다워 온몸에 소름이 끼칠 정도다. 그러나 여름과 겨울에 섣불리 이 길을 가려고 했다가는 큰 코를 다칠 수도 있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안개에 갇혀 머리카락이 쭈뼛 서는 경험도 몇 번은 해봐야 삶과 죽음이 눈 한번 깜박이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역시 겨울철에도 이 길은 잘 얼기 때문에 웬만한 월동장비와 더불어 든든한 배짱까지 갖춰야 지날 수 있는 길이다. 한겨울에 위험한 길은 또 있다. 동부 관광도로의 선흘 구간이다. 다른 곳은 눈이 다 녹아도 이곳은 훨씬 늦게 녹고 빨리 얼기 때문에 소심한 나는 번번이 이 길이 무서워 일주도로를 빙 돌아 집에 이르곤 한다. 일주도로를 빙 돌아 집에 오는 길, 먼 바다 위에 떠 있는 고깃배를 힐끔거리는 것으로 그 지루함을 달래기도 한다.가 보지 않은 길은 나를 시험에 들게 하겠지만 이내 익숙해져서 내게 세상살아가는 슬기를 심어주리라는 생각을 하는 것도 길 위에서이다. 조선희/「마흔에 밭을 일구다」의 저자, 남제주군 표선면 토산리제298호(2002년 1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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