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집] ⑩서양화가 故 이중섭의 서귀포 거주지

▲ 이중섭이 1년간 피난살이했던 초가.
피란살이 천재화가 품어준 알자리동산 초가
<섶섬 있는 풍경> <서귀포의 환상>의 산실

햇살 따사로운 겨울날 초가 마루에 걸터앉아본다. 조용하다. 시내 한복판임에도 멀리서 들리는 찻소리뿐, 울안을 넘나드는 겨울새들만 분주한 오후다. 혹여나 섶섬이 보일까 까치발을 디뎌보지만 시야를 가리는 건물들이 원망스럽다. 바다도, 섶섬도, 자구리 해안도 보이지 않는 이 초가 자체가 마치 도심 속에 떠있는 하나의 섬인 것만 같다.

한국 미술사에 묵직한 족적을 남긴 서양화가 이중섭(1916~1956)이 일본인 부인 이남덕(山本方子·야마모토 마사꼬)과 세살, 다섯 살배기 두 아들 태현·태성과 1년 가까이 머물렀던 곳. 지금은 이중섭 거주지로 단장되어 2003년 <섶섬이 있는 풍경>에 나오는 초가 자리에 건립된 이중섭 미술관과 함께 그의 흔적을 찾는 사람들의 발길을 머물게 하는 곳이다. 사람은 가고 없어도 여전히 그 자리에 남아 선물과도 같은 '기억'들을 선사해주고 있으니, 바로 예술가의 집이 지닌 숙명이 이런 것일 게다.

▲ 이중섭 미술관 주차장에서 거주지로 통하는 올레.
이중섭 가족이 서귀포에 닿은 것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듬해인 1951년 1월. 부산에 피란했다가 '남쪽으로, 더 남쪽으로' 따뜻한 나라를 찾아 화순항(이남덕여사의 기억에 따르면)에 내려서 걸어 걸어 찾아든 곳이 서귀포, 바로 섶섬이 보이는 지금의 거주지, 두 평이 채 되지 않는 부엌(6.39㎡)이 딸린 한 평반(4.70㎡)짜리 방이었다.

57년 전이나 지금이나 이 집의 주인인 김순복할머니(88)는 '한겨울 밤중에 아무 세간도 없이 보따리 2개만 들고' 나타난 이중섭 가족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비만 오지 않으면 네 식구가 자구리에 나가 게를 잡고 스케치를 했으며, 지금의 거주지 부엌에 걸어놓은 솥단지가 아닌 군인용 반합에 밥을 해먹고 게도 삶아먹었다는 증언 역시 김할머니가 전해주지 않았으면 알 수 없었을 화가 일가의 일상이다.  

▲ 네 식구가 어찌 살았을가 싶을만큼 비좁은 방 내부.
전쟁을 피해 따뜻한 남쪽나라를 찾은 이중섭 가족이 1년간 삶을 부렸던 공간을 둘러본다. 1948년에 지은 집이라니 사람 나이로 치면 올해 환갑을 맞은 초가의 끝 방. 세간이 없었기 망정이지 세간 두고 네 식구가 복닥거리기에는 턱없이 비좁은 공간이다. 그러나 서귀포를 떠나면서 부인 이여사가 "이 집에서 보낸 1년이 평생 가장 행복했다"고 김할머니에게 허리 숙여 감사했다고 하니 궁핍하다고 해서 꼭 불행하지만도 않은 것이 사람살이임에 분명하다.

좁아터진 방에서 네 식구는 꼭 부둥켜안고 자야 했으리라. 아침이면 섶섬이 부르는 파도소리에 눈을 뜬 그들은 좁아터진 방을 벗어나 자구리로 내달아 게를 잡으며 하루를 보냈으리라. 그렇기에 이 시절에 남긴 <파란 게와 어린이>, <두 아이와 물고기와 게>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얼굴과 몸이 맑고 건강하기가 그들이 자구리에서 금방 잡은 물고기와 게와 다를 바가 없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팔딱이는 물고기와 게처럼 싱그럽고 아름다웠으니 이중섭의 <서귀포의 환상>은 어쩌면 '환상'이 아니라 정작 환상의 '실체'를 그린 것은 아니었을까.

▲ 이중섭이 아이들과 게를 잡으며 시간을 보냈던 자구리해안.
소·닭·게·어린이 주소재...동화적이고 향토적
銀紙畵에 남은 가난뱅이 천재화가의 손길

주인을 잃은 방안을 지키고 있는 것은 이중섭의 사진 한 점과 그가 쓴 '소의 말'이라는 시 한 수.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이라는 구절에 머문 눈길을 쉬 거둘 수 없다. 행복했던 서귀포 시절 이후의 그의 신산했던 삶의 궤적을 그 자신은 미리 예감이라도 하고 있었던 것일까. 서귀포를 떠나 부산으로 갔으나 전쟁은 끝나지 않고 생활고는 극심해지고 결국 1952년 부인과 아이들을 일본으로 보내야 했던, 예술가 이전의 가장(家長) 이중섭. 선원증을 얻어 가족을 만나러 갔으나 일주일의 짧은 만남 뒤 되돌아와 정신분열증세와 영양실조, 전신쇠약, 간염 등을 겪다 만 40의 짧아도 너무나 짧은 생을 마감하기까지 그는 지독한 외로움과 서글픔과 그리움을 감내해야 했다.

▲ 어릴 적 기억을 더듬어 이중섭의 서귀포시대를 전해주는 강치균 문화관광해설사.
이중섭 미술관의 문화관광해설사 강치균씨(65). 그는 화가가 그리 길지 않은 서귀포 시절 그 자신도 모르게 맺어놓은 소중한 인연의 주인공이다. 피란 온 '우수어린 얼굴'의 화가 이중섭을 만났을 때가 물정모르고 동무들과 칼싸움하던 초등학교 2학년 무렵. 일본에서 오래 살다 돌아와 시계포를 하던 부친은 이중섭에게 자주 담배를 사주었고 그를 계기로 꽤 두터운 친분을 가졌다고. 그게 무척 고마웠는지 피란살이를 끝내고 돌아가면서 나무토막에 그린 유화 한 점을 부친에게 선물했더란다. 바다에서 아이들이 고기를 잡아 어깨에 메고 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었는데 그 고기가 어찌나 큰지 어린 눈에는 그 그림이 지극히 비현실적으로만 보였다고 회상한다.

▲ 거주지 초가에서 바라본 미술관. 지금 미술관 자리는 <섶섬있는 풍경>에 나오는 초가가 있던 자리다.
▲ 강치균 해설사가 가꾸는 '우영팟'. 사시사철 싱그러운 푸성귀와 야생화를 볼 수있다.
"그림을 보면서 '어떻게 아이들이 저렇게 큰 물고기를 잡을 수 있지?'하는 생각만 들었으니 그 정도로 제가 어렸던 겁니다. 그때는 화가에 대해 소상히 알 수도 없었지만 어릴 적 기억을 바탕으로 화가에 대해 공부하고 자료를 모으다보니 그의 서귀포시대를 들려주는 해설사가 되었습니다." 생전에 초상화를 그리지 않던 화가가 서귀포에 머물면서 남긴 네 점의 초상화에 대한 이야기도 강씨가 전해주는 귀중한 자료의 하나이다.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세 점 외에 또 한 점은 김할머니에게 감사의 마음을 담아 그려준 김할머니 남편의 초상화였다. 김할머니는 열일곱 살에 3대 독자 집안에 시집와 내리 딸만 다섯을 둔 탓에 평생 한이 맺힌 터에 돌아가신 영감님이 꿈속에서도 나타나 아들타령으로 구박을 하자 그만 영감님의 초상화를 찢어 불태워버렸다는 것. 초상화가 없어진 것은 안타깝기 그지없는 일이나 그 뒤로는 영감님이 꿈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연도 강씨가 있기에 전해들을 수 있는 이야기이다.

한 사내가 있었다.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현대적인 화가, 천재화가로 불렸던 사내. 중학 시절부터 소를 즐겨 그렸던 사내. 물감 살 돈이 없어 담뱃갑 은지에 그림을 그렸던 사내. 자구리에서 너무 많은 게를 잡아먹어 미안한 마음에서 게를 자주 그렸다는 사내.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가족과 생이별한 뒤 전국을 떠돌며 부두노동을 했던 사내. 일생에 단 한번 개인전을 열었으나 결국은 빈털터리로 생활고와 병마를 이기지 못한 채 쓸쓸히 눈을 감은 사내. 무연고자로 처리돼 사흘이나 주검이 방치됐던 사내. 이 사내를 기억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머물렀던 공간이 남아있기에, 그 공간을 중심으로 맺어진 김할머니나 강씨와 같은 소중한 인연들이 있기에 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 사내 긴 머리칼 날리며/ 지긋이 눈을 감고/ 담배에 불을 붙이네/ 꿈이 다 탈 때까지/ 그 사내 눈을 뜨지 않았네// 그 사내 두 아이와 아내 생각/ 서귀포에 살던 날들/웃음소리 들리는 듯이/꿈이 아니었으면 해/그 사내 눈을 뜨지 않았네 (김현성 글·곡)

<조선희/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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