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집⑪-사진작가 故 김영갑의 성읍 작업실

몸이 정신을 담는 그릇이라면 집은 사람의 역사가 오롯이 담긴 그릇일 터이다. 한 생명이 태어나 숨을 받고 많은 인연들 속에서 자라고 나이를 먹어가고 무수한 인연을 이어가는 것을 말없이 지켜보아온 집. 하물며 예술가의 집이랴.   

깊은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끝없이 영혼을 담금질하는 예술가들의 고뇌를 침묵 속에서 지켜보는 것 또한 예술가의 집이 지닌 숙명이 아닐는지. 그래서인지 예술가의 집은 거기에 깃들어 사는 예술가와 그가 매번 엄청난 산통(産痛) 끝에 세상에 내놓는 작품들과 꼭 닮아있다.                            

바다와 오름과 돌담이 하나로 어우러진 제주 곳곳에는 예술가의 집이 보석처럼 알알이 박혀있다. 들여다보고 싶어도 쉽게 드나들 수 없는, 궁금하다고 해서 아무 때나 불쑥 찾아갈 수 없는 예술가의 집들을 순례하는 여정은 아마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멀리 있는 듯한 예술가들의 일상의 숨결과 더불어 늘 깨어있는 예술혼을 더듬어보는 기회가 될 듯도 하다.      <편집자 주>

▲ 갤러리 두모악으로 옮기기 전까지 작가가 살았던 작업실.
오름 찍으려 애월서 성읍으로 거처 옮겨
20년 제주살이, 가장 오래 호흡했던 공간

 1982년부터 제주도를 오르내리며 사진작업을 하던 중 제주도에 매료되어 1985년 아예 정착한 사람. 바닷가와 중산간, 한라산과 마라도 등 ‘삽시간의 황홀’을 사진에 붙들어 매기 위해 20년 동안 고향땅을 밟지 못한 사람. 밥 먹을 돈을 아껴 필름을 사고 배가 고프면 들판의 당근이나 고구마로 허기를 달랜 사람. 세상 돌아가는 이치가 궁금해서 사진가가 된 사람. 그리고 사진을 찍으면서 비로소 아름다운 세상을 만난 사람. 그러나 정작 끼니를 해결할 만큼 형편이 좋아질 무렵 카메라 셔터를 누를 수 없게 된 사람.

죽어서 전설이 된 사진작가 故 김영갑 이야기다.
1957년에 충남 부여에서 태어난 그는 2005년 5월 만 48세의 젊은 나이에, 제주에 정착한지 딱 스무 해만에 눈을 감았다. 루게릭(근위축성 측삭경화증)이라는 이름도 낯설기만 한 병마와 5년 남짓 싸우다 흙으로 돌아갈 때 그의 몸무게는 30kg대였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무기력하게 앓기만 하다가 병마에 스러진 것이 아니었다. 지금 그를 기억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은 그가 발병 사실을 알게 된 시점에서부터 타계한 시점의 한복판인 2002년 여름 문을 열었다. 발이 닳도록 돌아다니던 제주섬을 더 이상 나다닐 수 없게 되자 그는 갤러리 두모악에 아예 작은 제주섬을 하나 만들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억새가 흐드러지고 야생화가 소리 없이 피었다 지도록 꾸민 폐교 마당은 한라산을 껴안은 제주섬, 바로 그것이었다. 그를 불러들인 땅, 그가 마지막 순간까지 두 눈에 넣은 채 숨을 멎은 땅은 바로 ‘은은한 황홀’의 땅 제주였다.

문득 그가 머물렀던 흔적을 더듬어보고 싶어졌다. 물론 갤러리 두모악에는 그가 타계할 때까지 기거하던 방이 남아있다. 그러나 순간 순간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바라보며 나직한 숨을 내쉬던 공간이 아니라 건장한 체구의 건강했던 그가 맹렬하게 호흡하던 공간을 보고 싶다. ‘함께 살고 싶다던’ 연인과 ‘그 사랑에 보답하는 것이 꿈이자 살아가는 이유’였던 어머니와 ‘게으름을 피우거나 한눈을 팔다가도 제자리로 올 수 있게 만드는’ 누이를 뿌리치고 오로지 사진을 찍기 위해 제주에 들어올 무렵의 그는 육체와 정신이 얼마나 강건했을 것인가. 그런 그가 허기진 배를 부여안고도 두 눈을 부릅뜨고 사진을 만들던 작업실을 보고 싶어 길을 나선다.

그 길을, 작가를 삼촌처럼 따랐던 제자이자 작가의 생전과 사후 늘 갤러리 두모악을 지켜온 박훈일 관장(40)이 동행삼아 따라나선다. 아니다. 따라나선 것은 박관장이 아니다. 어느 누구라도 박관장을 앞세워야 작가의 흔적을 더듬는 것이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제주시에서 번영로를 따라 오다 대천동 네거리를 지나 얼마 오래지 않아 멈춰 선 자리. 비교적 널찍하게 닦인 올레를 지나 마당에 들어서면 갑자기 눈이 황홀해진다. 온갖 제주 야생화와 야생초, 제주돌(石)으로 그득한 마당. 이 곳이 바로 작가가 머물렀던 공간이자 그에게 기꺼이 방을 내주었던 박관장의 부모가 지금도 거주하는 곳이다.

▲ 세 번씩이나 작가가 살 방을 내어준 성읍의 박창언씨. 갤러리 두모악의 박훈일 관장의 부친이기도 하다.
열두 살 많은 띠동갑으로 박관장의 아버지 박창언씨(64)와 어머니 문단옥씨(64)는 작가와 이십년 가까이 혈육보다 가까운 인연을 맺은 사이. 

“원래 동귀 쪽에 살던 사람인데 오름에 반해서 꼭 이쪽에 살고 싶다고 부탁을 합디다. 그래서 이런 데라도 살고 싶다면 와서 살라 했더니 그 뒷날인가 금세 짐을 싸들고 온 거예요.”

“밭일을 갔다 오니 회색 모자(도리우찌)를 쓴 사람이 사진 찍는 사람이라며 방을 빌려달라고 한다는 거예요. 사람이 좋아 보이니 빌려주자, 그래서 빌려준 거지요. 그땐 우리도 어려웠고 그 사람도 어려웠으니 그토록 오래 좋은 인연이 이어질 수 있었다고 봐요. 서로 어려우니 서로 의지하고 기댔던 거지요.”

이 때가 87년. 처음부터 이 집으로 옮겨온 것은 아니었다. 길을 사이에 두고 지금의 집과 마주한 곳에 박관장네가 살았고 작가는 처음 그 집에 들었던 것이다. 그러다 박씨의 사업 실패로 집이 넘어가자 작가는 성읍2리에 있는  박씨의 또 다른  집으로 거처를 옮기게 된다. 작가의 책 <그 섬에 내가 있었네>에 쓰고 있듯 확대기 하나만 건지고 사진이나 필름, 책들을 몽땅 다 잃어버린 그 혹독한 물난리를 겪은 곳이 바로 성읍2리의 집. 박씨는 지금의 이 집을 88년에 지었고 다시 작가는 89년쯤 이사 와서 박씨 가족과 합류하게 된다. 물론 그 사이 잠깐씩 성읍이나 대천동에서 살기도 했지만 2002년 삼달리 갤러리로 옮기기 전까지 죽 살던 곳이니 이 집은 곧 그의 20년 제주생활 가운데 가장 긴 시간을 그와 함께 했던 공간이다.

▲ 작가가 투병중에 만든 삼달리 <김영갑 개러리 두모악>의 최근 모습.
“영혼을 눈을 열어주는 삽시간의 황홀” 렌즈에 담아
갤러리 두모악, ‘젊음의 흔적 비늘처럼 붙은 사진’ 전시

박씨가 애써 가꿔놓은 마당을 에돌아 작가의 작업실로 향한다. 출입문 앞에 징검다리처럼 놓인 벽돌에 이끼 융단이 깔려있다. 아, 습하다. 습한 대기에 둘러싸인 모든 것들이 안개 속에서처럼 살아 움직이는 듯 하다. 쑥대낭을 감싸고 오르는 넝쿨류나 집 전체에 깔린 잔디와 이끼류, 화분에 심어진 야생화들이 동시에 촉촉한 혓바닥을 내밀며 말을 건네올 것만 같다. 출입문을 확 열어젖히자 여기저기 곰팡이로 얼룩진 실내가 눈에 들어온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작가를 처음 만난 박관장이 그와 함께 살았던 집이다. 역시 닭띠로 작가와 띠동갑인 박관장은 그에게서 사진을 배운 그의 애제자였고 그의 마지막까지 곁을 떠나지 않은 믿음직한 ‘조카’였던 셈이다.

이들 네 명 닭띠 사이에 도대체 전생의 어떤 굵직한 인연이 얽히고 설켰길래 박관장의 부모는 사는 집마다 작가를 맞아주었고 박관장은 지금껏 갤러리 두모악을 지키게 된 것일까.

“저희가 4형제인데, 외지에 있던 동생들이 돌아오는 명절이면 삼촌이 일일이 스케줄을 짜서 같이 모여 화투를 치곤 했습니다. 삼촌은 거의 돈을 따는 쪽이었는데 많이 잃은 사람에게 나눠주기도 하고요. 겨울이면 비디오테이프를 빌려다 하루에 영화 두세 편 보는 날도 많았지요. 말하자면 중산간 마을의 네 사내아이들에게 삼촌은 ‘문화의 세례’ 그 자체였어요.”

무엇보다도 “자신이 모르면 남에게 시킬 수도 없는 법이다”라는 작가의 권유로 일찌감치 배우게 된 컴퓨터 그래픽은 지금 갤러리에서 제작하는 엽서나 달력 디자인에 매우 유용하다. 작가 자신도 95년에 서울에 올라가 40여일 머물면서 컴퓨터를 배워왔다고 하니 그의 앞선 생각과 적극적인 행동이 읽혀지는 대목이다. 

이제 그의 사진을 들여다본다. 황혼녘에 찍힌 나무 한 그루가 흐느끼고 있다. 야트막한 돌담에 둘러싸여 피어있는 유채꽃은 들리지도 않는 속삭임을 건네온다. 막 이쁜 짓을 시작한 아이처럼 도라지꽃이 도리짓을 한다. 바람에 몸을 맡긴 나무가 미친 듯이 춤추고 있다. 그는 정녕 제주 자연만 찍은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을 족집게처럼 찍어낸 듯하다.

“...사진을 계속할 수 있는 한 나는 행복할 것입니다. 살아있음에 끝없이 감사할 것입니다. 나의 사진 속에는 비틀거리며 흘려보낸 내 젊음의 흔적들이 비늘처럼 붙어 있습니다. 기쁨과 슬픔, 좌절, 방황, 분노...내 사진은 내 삶과 영혼의 기록입니다.”  -김영갑, ‘한라산, 내 영혼의 고향’ 중에서

조선희/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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