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의 예술가의 집>12. 화가 강요배의 귀덕화사(歸德畵舍)
마흔에 돌아온 제주땅 … 귀덕화사에서 무르익는 畵風

▲마당에서 바라본 귀덕화사의 모습.
3월도 이미 중순에 들어섰는데도 난데없는 한파다. 칼바람이 불어 코를 내놓고 걷기가 힘들 정도로 매운 날씨, 강요배 화백의 귀덕리 작업실을 향해 달리다보니 오른편으로 펼쳐진 바다가 말 그대로 '뒈싸진 바당'이다. 벌써 2년 전, 그러니까 2007년 제주도 문예회관에서 열린 강화백의 <섬빛깔전>에서 만난, 화면 가득히 밀려와 부서지는 포말로 채워진『뒈싸진 바당』도 아마 오늘처럼 칼바람 부는 날의 제주 바다 모습을 화폭에 옮긴 것이리라. 하지만 그 그림보다도 그 제목에 더 오래 마음이 머물렀던 것을 보면, 아마도 그것은 실제로 바람에 '뒈싸진' 바다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그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이의 '뒈싸진' 마음을 바다를 빌어 드러낸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귀덕 네거리에서 좌회전을 해서 조금만 가다보면 왼편으로 내(川)에 바짝 붙어 선, 투박하게 생긴 웬 창고 같은 건물이 금세 눈에 띈다. 이 겨울, 미처싹을 틔우기 전의 담쟁이넝쿨이 실핏줄처럼 칭칭 감긴 모습이 한눈에 봐도 그 자체가 '예술적'이다. 큰 비가 와서 내(川)가 범람이라도 할라치면 어김없이 수마에 휩쓸릴 것처럼 위태롭게도 보이는 입지조건. 그러나 소심한 사람이 보기에 그렇다는 것일 뿐, 견고하게 앉은 건물이나 그곳에 사는 화백이나 그 따위 근심에는 마음도 두지 않는 듯하다.

"이를테면 이곳은 전초기지 같은 곳이지요. 큰물이 지면 우르릉쾅쾅 쏟아져 흐르는 물을 바로 눈앞에서 볼 수 있으니까요. 자칫 위험하게도 생각되지만 그만큼 긴장감 속에서 자연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다는 매력이 있어요. 이곳에 처음 왔을 땐 바로 건무 앞까지 물이 찼었거든요."

▲ 귀덕화사 내부 모습 
귀덕화사(歸德畵舍).

강 화백의 귀덕리 작업실에 붙여진 이름이다. 처음엔 지명이 귀덕(貴德)인 줄 알았는데 귀덕(歸德)이라니 그 뜻이 퍽이나 웅숭깊어 보인다. 부귀와 덕망을 추종하기보다 덕으로 돌아가라는, 혹은 돌아간다는 뜻이고 보니 이보다 더 분명하게 인간살이의 지향점을 잘 드러내는 이름이 어디에 또 있을까. 아닌 게 아니라 강 화백도 처음 이곳에 작업실을 만들 때부터 마을 이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는 고백이다.

귀덕화사는 강 화백이 고향 제주에 돌아온 지 10년 만에 둥지를 튼 곳이다. 그가 대학 진학을 위해 서울로 올라간 것이 갓 스물의 시퍼런 나이. 그리고 불혹의 나이 마흔에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다. 3년에 걸쳐 제주 4·3항쟁을 그린 작품들로 역사그림 전시회 <동백꽃 지다>를 열어 그림으로 읽는 제주 4·3의 역사와 함께 강요배라는 이름을 세상에 알린 1992년의 일이다. 탯자리인 제주 삼양과는 거리가 먼 서쪽 옹포에 처음 작업실을 마련했다가 외도, 하귀 시절을 지나 귀덕에 머물기 시작한 것이 2001년. 내(川)를 정면에 두고 50평 규모로 앉힌 작업실은 그야말로 작업 전용 공간이다. 마을 안쪽에 살림집을 따로 두고 출퇴근을 하는 것이 훨씬 편리하고 유리하다는 강 화백의 생각에서다.

"내 경우 그림 작업 자체에 긴 시간을 할애하지 않아요. 집중해서 짧은 시간에 끝내버리는 타입이지요. 그 대신 많은 시간을 생각합니다. 작업은 너댓시간이면 충분하지만 눈뜨고 있는 시간 내내 생각하고 고민하고 궁리합니다. 그리고는 뜯었다 고쳤다 확 지웠다 하는 거지요. 그래서 작업공간과 살림공간이 분리되어야 생각과 실행의 전환에 유리하지요."

▲ 제주 토종 풀,꽃,나무가 가득한 마당을 거니는 강화백. 
귀덕화사에서 보이는 것, 만나는 것은 모두 곧 '제주'다. 춥디 추운 겨울날 제주 바당은 '뒈싸져도' 그의 마당엔 제주 수선과 갯?물(갓)꽃과 유채꽃이 한창이다. 마당을 그득 메운 꽃과 나무들은 야생 그대로 꽃과 열매로써 계절의 들고 나는 것을, 동쪽으로 드넓게 난 창은 밝은 낮에는 아스라이 한라산을, 어둑한 밤에는 차고 기우는 달을 환하게 보여준다. 이곳에서 화백은 낮과 밤으로 제주를 생각하고 자연을 궁리한다.

▲ 강요배 화백.
귀덕화사에서의 시도때도 없는 고민과 사유와 궁리는 <섬빛깔전>에서 확인할 수 있었듯이 화풍(畵風)의 변화라는 결실을 낳고 있는 듯하다.

"예전에 비해 단순해졌다고 할까요...단조로워진 느낌,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한편으론 그래서 더 시원해지고...점점 그런 스타일이 편합니다. 그림에서 설명적 요소를 줄이는 거지요. 사물의 외양이나 구체적 상태를 설명적으로 묘사기보다는 단순한 특징만 남기는 거지요. 본질이라면 너무 거창하고 '단순한 맛'이라는 말이 맞을 것 같습니다."

『황무지』가 김녕 들판을,『팽나무』가 외도 폭낭을,『겨울바다』가 하도리 바다를 그렸던 것처럼 그림을 통해 고스란히 시간과 공간을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 시간과 공간을 지우고 지극히 단순한, 그래서 궁극적인 고갱이만 남기는 시도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그러고 보니『뒈싸진 바당』은 제주의 바다 어디라 해도 상관없는 동시에 굳이 거기에서 바다를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을 듯하다. 풍성하고도 신비로운 청보랏빛 바다 한가운데 하얀 배와 외돌개 모양의 바위가 그려진 『섬』도 굳이 거기가 어느 섬이냐고, 진짜 외돌개 맞느냐고 의문을 품을 필요가 없을 것이다.

▲ 측면에서 바라본 귀덕화사의 모습

그래도 아직 많은 이들의 뇌리 속에는 <동백꽃 지다>의 '4·3화가 강요배'로 기억되고 있을 법하다.

"제주 사람이라면 4·3이 이미 몸에 물들어 있다고 봐야지요. 무슨 작업을 하든지 그 연장선에서 이뤄지고 있는 게 아닐까요...1년에 한 두 점은 4·3작품을 하게 되는데 하면 할수록 정말 풍부한 영역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예를 들어 북촌의 너븐숭이나 옴팡밭에서의 처참한 죽음 장면들은 아직 미술적으로 형상화되어 있지 않거든요. 문학적 형상화는 그런대로 이뤄지고 있는 것 같은데 미술적으로는 아직 시도도 되지 않은 부분이에요. 아직 내 그림에도 그 처참하고 처절한 장면들이 드러나 있지 않습니다. 4·3 후유증 문제도 그렇고...파고 들어가야 할 것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은 아직 내가 그 때를 잡지 못하고 있어요. 앞으로의 숙제이지요."

'그 때'가 언제인지는 모르지만 '걸려들기'만을 기다리고 있다는 강 화백은요즘 생애 처음으로 '휴지기'를 보내고 있다. 오로지 그림 그리고 그림 생각만 하는 강 화백에게도 취미거리이자 관심사가 있었으니 그것은 연 만들기. 어린 날 삼양 바닷가에서 날렸던 연을 추억하며 겨우내 연 만들기에 심취했다는 강 화백의 또 다른 욕심은 언젠가 제주 해안을 한 바퀴 돌며 제주 바람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만들었던 옛날 연의 형태와 기능을 조사 연구해 그대로 복원하는 것이란다. 머잖아 하얀 귀밑 머리칼을 휘날리며 전통 제주 연을 날리고 있는 강 화백을 만날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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