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희의 예술가의 집] 13. 소목장 양승필의 서호공방
30년 소목장 외길…제주형 목가구 일인자
덜 습한 곳 찾아 유수암에 둥지 튼 공방

▲ 안개에 싸인 서호공방
눈매고운 ‘굴무기’, 치밀하고 부드러운 ‘사오기’
시간과 연기로 숙성된 古材, 생활가구로 재탄생

‘한 다발의 수선화가 온 집안을 그 향으로 감싸듯, 집안 어느 언저리의 작은 목가구 한 점이 집안 전체의 기운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 오랜 세월 먼지가 끼고 정지(부엌)와 굴뚝에서 피어오른 연기에 그을어 처음보다 더 고운 질감과 진한 색으로 거듭난 나무들로 목가구를 만드는 사람. 30년 넘게 외길을 걸어오고 있는 소목장 양승필씨다. 일찍이 탐라목석원 백운철 원장은 그를 두고 ‘테왔다’고 했다. 선천적으로 제주 목공예 재주를 타고났다는 뜻이다.

1989년 제주 세종미술관에서 첫 전시를 한 후 20년 만인 2008년 서울 학고재 갤러리에서 <눈매가 고운 목가구-소목장 양승필 솜씨전>을 열자 전국에서 그의 솜씨를 탐하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는 즐거운 풍문을 따라 그를 만나러 가는 길, 하필 자욱한 안개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앞서 달리던 차가 어느 순간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리는 평화로를 엉금엉금 기어서 겨우 찾은 애월읍 유수암리 서호공방. 그의 중학 은사인 소암 현중화 선생이 지어준 西湖라는 호를 붙인 공방이다.

▲ 작업대에 앉은 양승필 소목장
1975년 우연히 아니 어쩌면 필연적으로 고가구 작업을 하던 목공예의 대가 박노영 선생을 만나 대패와 톱을 다루는 초보적인 기술에서부터 나무를 다루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때 그의 나이가 스물. 그러나 스승에게서 사사한 기간은 5년에 불과했다. 1981년 어린 아들을 데리고 바다에 해수욕을 갔던 박 선생이 익사 직전의 아들을 자신의 목숨과 맞바꾼 채 영원히 돌아오지 못할 길로 떠난 탓이다. 너무도 일찍 스승을 잃었지만 그는 오로지 나무만을 끼고 살면서 도를 닦듯 자신만의 제주형 목공예 세계를 열었다.

“89년 지금 생각하면 겁 없이 첫 작품전을 가졌는데, 그 후로 사람들이 어찌나 많이 찾아오는지 사람들을 피하려고 좀 외진 곳에 작업장을 갖고 싶었어요. 그래서 김영갑씨와도 절친한 사이라 성읍리 쪽을 알아보고 다녔는데 그 지역이 너무 습하더라고요. 습기는 목공예하고는 적이거든요. 그래서 고성리에 작업실을 내고 15년쯤 지내다가 5년 전에야 이곳에 작업실을 마련한 거지요.”

▲ 소목장의 손때가 묻은 연장들
유수암 지역은 비교적 다른 지역보다 건조한 편인데다 바다가 보이는 경관이 마음에 들어 2004년 살림집과 함께 공방을 차렸다. 수작업을 하는 15평 정도의 작업실과 10평 남짓한 재단작업실에는 제습기가 사시사철 스물네 시간 쉼 없이 돌아가고 있다.

이 작업실 못지않게 소중한 공간이 바로 고재(古材)를 쌓아둔 창고. 제주에 주택개량 바람이 불면서 맥없이 헐려나간 초가에서 뜯어낸 문짝이며 문지방, 마루, 문틀 등 고재로 작업을 해오고 있는 그에게 고재창고는 보물창고나 다름없다. 문외한의 눈으로는 먼지가 켜켜이 쌓인 쓸모없는 나무로만 보이지만 그는 그 나무에 얹힌 세월의 무게와 흔적을 깊이 사랑한다. 그 중에서도 제주 옛사람들이 초가집을 짓고 각종 생활도구를 만들어 썼던 사오기(산벚나무)와 굴무기(느티나무)사랑은 각별하다.

“제주는 바람이 강하고 화산회토라 사오기와 굴무기가 잘 자라는 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성장률이 다소 떨어져 나이테 간격이 좁고 재질이 단단하고 치밀한데다 눈매가 무척 곱지요. 워낙 색감이나 질감이 좋은 나무인데다 오랜 세월 사람과 함께 하면서 매운 연기와 시간으로 숙성되다 보면 원래보다 더 곱고 진한 색을 띠게 되는 거지요.”

▲ 삼십년 동안 모은 고재가 보관된 창고
붉은 색을 띠는 굴무기는 눈매(나뭇결 무늬)가 큰 것이 매력이고 흑갈색의 사오기는 밀도가 조밀하여 눈매보다는 마치 여성의 손을 어루만지는 듯한 부드러운 질감이 미덕이다. 새마을운동이다 주택개량사업이다 해서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해버린 제주 초가가 무수히 뜯겨진 것이 그에게는 도리어 행운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신구간을 전후해서 쏟아져 나오는 고재들을 그러모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옛말. 신구간이라고 해서 뜯어낼 초가가 없는 탓에 그의 보물창고에 새로이 입성하는 고재도 더 이상 없다.

몇 십 년을 제주 화산회토와 현무암 틈바구니에 뿌리 내리고 살다가 또 몇 십 년을 사람의 입김 속에 살다가 다시 몇 십 년을 그의 창고에서 숨을 고르던 사오기와 굴무기는 그의 손길 끝에서 다시 살레의 생명을 잇는다. 살레는 제주 전통 가옥의 부엌에서 쓰이던 찬장의 어여쁜 제주 이름이다.

▲ 사오기 고재로 만든 살레.
“잊혀진 제주 부엌가구 살레를 되살려 우리 일상생활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스스로 자부심을 느낍니다. 예전에 살레는 그저 부엌 찬장이었을 뿐 방안에 들여놓지 않았거든요. 현대적 감각으로도 절대 뒤지지 않는 살레의 조형미에 반해 지금까지 살레를 만들어오고 있어요.”

제주 밖의 사람들이 ‘살레’라는 어여쁜 이름과 단순하고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그 조형미에 빠지게 된 것도 순전히 그것을 복원하고 현대적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해오고 있는 그의 덕분이다. 어린 시절 늘 정지에 놓여있던 살레에 익숙한 제주 사람들은 오히려 감흥이 덜한 편이어서 그의 작품의 90% 정도를 외지인이 소장하고 있다고 한다. 제주 살레가 그의 ‘눈매 고운 솜씨’ 덕분에 바야흐로 ‘전국구’ 가구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때로는 입을 꼭 앙다물고 있는 앙증맞은 소녀처럼, 때로는 아무도 범접하기 어려운 매서운 기품을 지닌 여인처럼 단아하고 아름다운 제주 살레는 거저 만들어지는 아니다. 디자인를 한 뒤 그에 적절한 나무를 찾아서 고재에 붙은 이물질을 제거하고, 이것을 재단하고 대패질을 해서 구성을 하고, 제각기 위치에 들어갈 이음새 등을 만들어 조립하고, 수차례 사포질을 하고 기름을 먹여 마무리하기까지 그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다. 기계도 쓰긴 하지만 대부분 수작업인 탓이다. 아직껏 그의 솜씨를 전수받겠다고 나서는 젊은이가 없는 까닭이다.

▲ 켜켜이 세월의 더께가 더해진 고재들
“나무는 외부 습도에 민감해서 켜고 자르고 깎아 잘 다듬어놓아도 수축하거나 팽창하거나 휘어지기도 합니다. 또 옛날 가옥과 민구류에서 나온 재목이라 있는 재료의 크기와 넓이를 최대한 살려서 작업해야 하는 어려움이 큽니다. 저는 그저 최선을 다해서 만들 뿐 만들어진 뒤에 놓이는 환경에 따라 뒤틀리거나 휘거나 그 나머지는 다 나무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나무는 살아있으니까요. 적어도 100살 먹은 고재로 만들기 때문에 타거나 물에 잠기지 않는 한 영원한 생명을 이어가는 것이 고재로 만든 가구입니다. 이것을 만드는 작업이 제 일이자 제 삶입니다.”

<조선희/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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