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주체성은 바로 주인정신이요

우리는 어떠한 상황, 어떠한 경우에 처하든 거기에 끌려가지 않고 자기의 주체성(主體性)을 스스로 간직하여 언제 어디서나 자주와 자율로 자유 의지를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주인 정신이요 책임감이다.주인 정신은 주(主)와 객(客)으로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 즉, 주객을 넘어선 자리에서 주체성을 발휘함이 바로 주인 정신이 서게 되는 것이다. 주체를 자각하고 나면 끝내 주인 정신이 따로 있고 책임감이 달리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주체성이 확립되면 스스로 행위의 주체가 되어 정당성을 자신의 통찰력으로써 발견하고, 또한 만들어 내는 능력이 구유하기 때문에 함부로 주변 상황에 예속되어 끌려 다니는 일은 없을 것이다.주체성을 상실하여 주변 상황에 끌려 다니는 우화 하나를 소개한다.아버지와 아들이 당나귀를 끌고 가는 것을 보고, 어떤 사람이 “멍청한 사람들이군, 누구든 타고 갈 것이지”하고 중얼거렸다. 이 말을 듣고, 아들은 과연 그렇구나 하고 아버지를 당나귀에 태우고 자기는 고삐를 끌었다. 한참 길을 가는데 마주친 어떤 행인이 “아들이 가엾다”하고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에는 아들이 당나귀를 타고 아버지가 고삐를 끌었다. 그러나 얼마 못 가서 “불효자식이군”하는 소리가 행인의 입에서 들려왔다.아버지와 아들은 생각한 끝에 누구의 입에서도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해 두 사람이 함께 당나귀를 탔다. 이제 됐다고 생각했는데 곧 “당나귀가 가엾군”하는 비난의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은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하여 당나귀에서 내려 이번에는 당나귀를 함께 메고 걸어갔다고 한다.이 우화는 주견없이 남의 의견에 끌려 다니어 편협된 판단과 맹목적인 행동으로 자기 설자리를 지키지 못하는 어리석은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세상사 모든 사물을 꿰뚫어 보면 어느것 하나 바탕이 없는 것이 없다. 모두 주체성이 있다는 말이 되겠다.성구(聖句)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니라” 부연해 말하자면, 어디서나 주체성을 갖고 전력을 다하면 진실 된 것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흔히 주체성을 가지자는 말을 하는데. 주체성을 갖는다는 것은 어디서나 전력투구(全力投球)를 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한다.그러면 어디서나 주인공을 만날 수 있다. 인간은 여기서 삶의 보람을 느끼게 된다. 세상에 존재하는 일체의 것은 내면에 주인공 자리가 있고 맡은바 구실을 완수할 때 이름이 있게 된다. 이름이 있다는 것은 바꾸어 말하면 주체성이 있다는 것이며, 이 주체성이 근원하여 이에 상응한 이름과 구실이 부여되는 것이 세상사의 통념이다.비근한 예를 들면, 하나의 가옥에서 기둥은 기둥 구실을 다하고, 서까래는 서까래 구실을 다하고, 들보는 들보 구실을 다하여 제자리에서 전력투구가 될 때 전체 작용으로 건전한 가옥이 유지되는 것이다.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우리의 삶은 본 바탕에서 사는 모습이요 주인공이 하는 처사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책임있는 삶의 주체성과 주인 정신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주체성과 주인 정신은 책임 행동으로 하여금 밖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주체성과 책임감은 둘이 아니라 하나인 것이다. 책임감이 강한 사람일수록 주체성과 주인 정신이 투철하고 강한 것이다.그러므로 주체성과 주인 정신은 책임을 낳게 하는 원천이 된다. 아버지는 아버지 구실을, 어머니는 어머니 구실을, 자녀는 자녀의 구실을, 시민은 시민 구실을 다 할 때 가정과 시민사회는 행복의 꽃이 피고 화락의 훈훈한 바람이 부는 것이요, 이와 반대로 제 구실을 외면할 때 불황의 찬바람이 불고 불행이 어두운 그림자가 본성을 덮이게 된다.주체를 자각하고 매사에 주인 정신을 발휘할 때 만사는 원만히 성취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성은 주인 정신이요, 책임감 임을 분명히 알고 수행할 일이다.오남련/논설위원·전 서귀포교육청 교육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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