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교육문화도시 건설의 티핑

“금 나와라, 뚝딱!” 으로 금이 나오게 할 수는 없다. 주문으로 세상 일이 비롯된 것은 단언컨대, 아무것도 없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성경 창세기편은 그렇게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렇게 세상이 시작되었으리라고 글자 그대로 믿는다면 그는 여호와의 증인을 비난해서도 안되고 통일교를 사이비라 비난할 자격도 없다. 그렇게 해서 세상이 창조된 게 아니기 때문이다. 주문이나 기도만으로 세상을 존재케 할 수 있다고 믿고 있거나 믿고 싶다면 그것은 어리석거나 다른 이유 때문이다. “국제자유도시 건설!” 지난 지방선거 기간 동안 정부와 여당, 그리고 여당후보는 “국제자유도시건설!”이라는 주문을 외치고 다녔다. 마치 “국제자유도시 나와라, 뚝딱!” 하듯이. 하지만 현실은 오늘날 우리가 보는 바와 같다. 그렇다. 주문은 그것이 무엇이든 어쨌든 생겨나게 할 수 없다. 아무리 지극정성으로 외쳐댄들. 예나제나 ‘주문’은 다만 민심을 달래거나 기만하기 위한 것이다. 교육문화도시! 역시 주문으로 될 일이 아니다. 행정가나 주민들이 믿든 말든, 기대하든 말든…, 그것을 실제로 가능케 하는 현실적 조건, 그것들을 충족시키지 않고서는 실현될 수 없다. 손으로 동쪽을 가리키면서 몸은 서쪽으로 향하고 있다면 그는 천날만날을 가더라도 결코 동쪽으로는 단 한걸음도 나아갈 수 없다. 삼척동자도 다 아는 그저 평범한 진리이다. 일본 오이타현의 일현일품 운동의 아이디어의 구상은 인재육성으로부터 그 현실화 작업이 시작되었다. 아이디어 자체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 없다. 그것은 하나의, 시작의, 단초의 의미를 가질 뿐이다. 하기는 아이디어가 없다면 ‘인재(人材)’는 말 그대로 쓰일 데가 없다. 인재는 여러 모로 쓰인다. 이렇게도 쓰인다. 이를테면 눈사람을 만들려면 우선 눈덩이를 크게 굴려내야 한다. 눈덩이! 그러나 눈만으로 눈덩이를 굴려낼 수 없음은 그것을 실제로 만들어본 사람은 안다. 눈을 집어 꽁꽁 뭉쳐본들 그렇게 해서 제대로 된 눈덩이를 이루어낼 수는 없다. 그 안에 조그만 돌멩이나 하다못해 나뭇가지나 조그만 연탄재 덩어리라도 하나쯤 있어야 한다. 그것이다. 일품운동으로 유명한 오이타현지사가 맨먼저 부르짖은 것은 인재를 키우자였다. 인재는 말하자면 눈덩이를 크게 일구어낼 동기인 돌멩이였던 것이다. 조그만 계기가 엄청난 변화를 몰고오는 사회적 현상을 탁월한 통찰력으로 형상화낸 말콤 글래드웰의 “티핑 포인트”에는 폴 리비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나중에 미국독립전쟁의 단초를 이루어낸 인물로 미국역사교과서에 등장하는 그는 1775년4월 어느날 영국군이 쳐들어온다는 첩보를 듣고는 직접 곧장 이 마을 저 마을로 파발마를 달린다. 그로부터 비롯되어 보스턴 일대의 식민지 민병대는 단시간내에 영국군에 대항하여 조직적이고 격렬한 저항을 일구어내었다. 콩코드에서의 열전은 식민지 민병대의 대승리로 끝났고,미국은 그렇게 혁명전쟁을 이끌어갔다. 눈사람 속의 돌멩이 하나는 눈덩이를 일구는 씨앗이 되었고 폴 리비어의 파발은 미국혁명전쟁의 승리의 씨앗이 되었다. 그렇듯이 ‘겨자씨’ 하나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의식한 것이었든 무의식의 산물이었든 엄청난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교육문화도시를 의식적으로 만들어내고자 한다면 그 씨앗에 조직적인 관심을 가질 일이다. 소수의 선각자적인 인재, 그것이 작은 계기로 큰 변화를 일구어내는 티핑 포인트의 요점의 하나이다. 교육문화도시 건설이라는 큰 변화의 시작은 소수 인재의 존재, 그것이다. 그러나 눈밭 한가운데 무엇인가가 털썩 떨어진다고 단번에 저절로 눈덩이로 굴러서 커가는 게 아니다. 폴 리비어의 경우만 하더라도, 윌리엄 도우스라는 인물 역시 폴 리비어와 동일한 내용의 첩보를 가지고 다른 이웃지역으로 파발마를 달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치달려간 지역에서는 거의 미동도 일어나지 않았음은 주목할만한 대목이다. 어떤 역사학자들은 그곳이 공교롭게도 친영파가 대단한 지역이었을 것이라고 추론하기도 했으나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폴 리비어와 윌리엄 도우스의 결정적 차이는 그들 각자가 전한 메시지가 이후의 행동으로 전환 확장되면서 고착되는 데 기여할 수 있었느냐 하는 것이다. 전자는 성공했고 후자는 실패했다. 소수 인재의 혹은 행동이 ‘지역화’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은 그 소수 인재의 책임이자 역할인 동시에 그 지역이 갖고 있는 잠재적 성향의 문제이기도 하다. 소수 인재가 교육문화도시 건설을 위한 불을 지폈다 하더라도 그것이 유효한 시간내에 확산되고 그런 경향이 고착화될 수 있느냐 하는 책임은 이제 지역사회로 공동의 책임이자 역할로 넘어온다. 그 중요한 조건 중의 하나인 소요비용을 미국에서는 개인기부금이 상당 부분 충당한다. 뉴욕시립도서관을 필두로 한 미국 지역사회의 대부분의 교육문화시설과 운영은 개인들이 거액이나 십시일반으로 내는 기부금으로 재정의 대부분을 충당한다. 유럽쪽은 자치단체나 국가가 그 역할을 맡는다. 재정 부담의 용이성은 교육문화도시 건설의 중요한 매개자이다.(다음호에 계속)김학준/논설위원·이어도정보문화센터 이사장제333호(2002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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