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집] 도예작가 장근영의 남원 큰엉 도예공방
3代에 이은 말(馬)사랑, 다양한 도예작업으로 꽃피워

▲ 도로변 허름한 창고에 꾸며진 '큰엉 도예공방'
불가리아 유학...페이퍼 클레이로 독특한 질감 살려
제주마는 영원한 테마...마굿간 딸린 작업실 갖고파

"남조로를 타고 오시면 우회전 좌회전 하실 필요 없이 그냥 직진만 하시면 돼요. 곧장 오시면 바다에 닿기 직전에 작업실이 있거든요."

지난주에 이어 이번 주 역시 아주 색다른 작업실 탐방이 될 것 같은 예감이들었다. 그래, 시퍼렇게 젊은 나이에 필생의 작업 테마를 제주 조랑말로 정한 야무진 작가이니만큼 그 개성을 한눈에 드러내는 작업실을 만날 수 있겠군...그런데 그 다음 이어지는 작가의 말이 좀 심상치가 않다.

"남원까지 오셔서 바다 쪽으로 직진하시면 왼편에 △△가든이 있고요, 그 맞은편이 제 작업실입니다."

지금까지 여러 작가의 작업실을 둘러보았지만 이렇게 대놓고 '△△가든'과 같은 음식점과 이웃한 작업실은 없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남조로를 타고 직진한다. 한눈 팔 필요도 없이 곧장 달리기만 하면 되니 가는 길은 퍽 쉬웠다. 게다가 남원에 이르러 작업실을 찾는 일 또한 너무도 쉬웠다. 정말 그의 작업실 <큰엉 도예공방>은 도로변 한복판 '△△가든'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다.

▲ 서귀포시 남원읍 큰엉에 위치한 도예공방에서 작품과 함께 한 장근영 작가.
"좀 놀라셨죠? 이게 1950년대 돌창고인데요, 여기 길이 새로 나면서 절반 정도가 잘려 나가고 이렇게 절반만 살아난 거예요. 길 한복판 창고가 제 작업실이랍니다."

겉으로 봐서는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알아차릴 수 없는 창고에 들어서자 눈 닿는 데마다 흙으로 빚은 말(馬)천지이다. 손가락 한 마디 크기의 애기말,제법 우람하고 듬직한 어른 말의 두상(頭像), 벽걸이용 접시에 수를 놓듯 배열한 스무 마리의 손톱만한 말, 말의 몸통을 기하학적으로 구성한 현대적 감각의 말, 그릇 뚜껑 손잡이로 태어난 말, 주전자의 부리를 이루는 말...이곳은 흙으로 말을 빚는 도예작가 장근영의 마굿간인 셈이다.

말띠 남원 태생. 홍익대 미대 도예과 졸업. 불가리아 국립미술아카데미 도예과 석사. 유학 후 제주에 돌아와 고향 남원에서 도예작업중. 산업정보대 등 여러 곳에 강의중. 제주 교육대학원 재학중. 귀국 후 도예가회 정기전 등 대여섯 차례 전시. 얼마 전 1회 개인전(흙에서 태어난 조랑말).

▲ 순박한 제주 사람의 심성이 묻어나는 제주말 두상(頭像)
젊디젊은 장근영 작가에 대해 간단히 소개하자면 이 정도이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결코 간단하게 해결되지 않는 몇 가지 호기심이 인다. 왜 불가리아로 유학했을까? 왜 하필 테마가 말일까?

"졸업 후 3~4년 돈을 열심히 모아 동유럽 쪽으로 유학 갈 생각이었어요. 현대 도예 쪽은 미국 유학을 선호하지만 저는 동유럽을 애초에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마침 불가리아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뽑힌 거지요. 불가리아 정부초청 장학생으로는 1호인 셈인데 2002년부터 2005년까지 유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쿤(kyh)'으로 불렸단다. 사람들이 불가리아어로 발음하기 어려운 '장근영'이라는 이름의 가운데 글자 '근'을 '쿤'으로 부른 것. 그런데 기묘하게도 불가리아어로 말(馬)은 ‘콘(koh)’이었다. 당시 작가는 주야장천 말(馬) 작업을 하던 중이었다. 그야말로 동료들에게나 교수들에게 작가는 ‘콘(koh)’에 빠진 '쿤(kyh)'이었을 터. 작가는 자신의 이름자와 자신이 천착하고 있는 테마가 비슷한 발음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좋았다고 했다.

▲ 기하학적으로 형상화한 조랑말.

불가리아 유학에서 얻은 가장 소중한 소산물은 페이퍼 클레이(종이점토 · paper clay)라는 재료의 발견이었다. 흙에 10~30%의 종이를 첨가하여 만든 페이퍼 클레이는 최대 9cm의 두께로 작업을 할 수도 있고 종잇장처럼 얇게 작업을 할 수 있다는 이점을 지녔다. 뿐만 아니라 흙으로만 만들 경우 마른 뒤 혹은 초벌구이 뒤에는 다시 그 위에 흙을 붙여 작업을 할 수 없지만 페이퍼 클레이의 경우 마른 뒤에나 초벌구이 후에도 연속적인 작업이 가능하다. 하지만 매력이 큰 만큼 페이퍼 클레이를 만드는 과정은 꽤나 시간이 걸리고 수공이 드는 작업이다. 광택처리가 안 된 종이를 잘게 찢거나 잘라서 펄펄 끓는 물에 최소한 24시간 삭힌 뒤 잘 저어 섞은 다음 물을 짜내고 역시 잘게 부순 흙과 일정 비율로 섞어 물기를 빼내는 과정을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번 개인전에서는 페이퍼 클레이 작품을 많이 보여드리지 못했어요. 하지만 질감이 독특하고 종이를 겹겹이 쌓아 잘라놓은 듯한 단면이 지닌, 거칠면서도 따뜻한 느낌이 좋아 앞으로도 페이퍼 클레이 작업을 지속할 겁니다."

그런데 하고많은 테마 가운데 제주 조랑말을 선택한 것은 우연이었을까, 필연이었을까. 어린 시절 작가의 조부에게는 50여 마리나 되는 말이 있었고 조부는 중산간 마을에 외출할 때 으레 말을 타고 다니셨다고. 그 영향인지 작가의 부친은 말을 키우고 먹이는 일을 좋아하였고 말 사랑은 말 연구로 이어져 현재 제주마연구소장(장덕지 전 제주산업정보대 교수)을 맡고 계시단단다. 알고 보니 작가의 조랑말 작업은 3대에 이은 말 사랑의 결정판인 듯 하다.

▲ 순박한 제주 사람의 심성이 묻어나는 제주말 두상(頭像)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말을 늘 곁에 두고 사랑하시는 모습을 보고 자랐어요. 환경적으로 자연스럽게 말에 동화될 수 있었던 거지요. 물론 학교 다닐 때 바다의 물고기, 하늘의 새도 작업 테마였어요. 하지만 땅 위의 말이 제 영원한 테마가 될 것 같습니다."

작가의 말 작업에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바로 부친. 갖가지 자료를 보여주며 제주 조랑말의 모색(毛色)을 연구하게 하고 말의 생물학적·해부학적 궁금증을 해결해주는 협력자이자 동반자이자 막강한 후원자이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동물보호법으로 제주말싸움 놀이가 금지되면서 그 아쉬움을 삭이지 못한 부친은 작가에게 제주말싸움을 작품으로 승화시켜보라는 제안을 하기도 했다.

"예전에는 말은 권력이나 전쟁, 운송수단의 상징으로 대표됐지만 이제는 생활 속에서 그 상징성이 재해석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은 원체 사람을 잘 따르고 주인에 충성하는 동물이지요. 사람들은 제 말이 착하고 순한 얼굴을 하고 있다고 해요. 어떤 이들은 제주 사람들의 순박함이 묻어있다고도 하고요."

▲ 작가의 손에서 태어난 다양한 모습의 말들.
눈꼬리가 예쁘게 처져있으면 암말이라고 일러주는 작가는 작품 활동과 병행해 제주 조랑말을 제주의 관광 상품으로 개발하는 일도 시도하고 싶단다. 다른 서양말보다 크기가 작은 불가리아 말보다 더 작은 제주 조랑말은 제주만의 특색과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좋은 소재라는 생각에서다. 말을 더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실제로 말을 키우면서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갖고 싶다는 바람도 털어놓는다.

작가의 작업실을 빠져나와 다시 직진으로만 제주시에 이르는 길, 그렇게 앞으로도 한눈팔지 않고 외길로만 반듯하게 그의 작업이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다음에 우연히 만나면 길 한복판의 허름한 창고 작업실이 지금까지 만난 여느 예술가의 작업실 못지않게 아름다웠노라고 전해줄 생각이다.

<조선희/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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