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팡]‘마지막 가을운동회’/학교

며칠 전 작은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작은 아이가 6학년인 까닭에 당사자는 물론 우리 부부도 초등학생 학부모로서는 마지막으로 참여하는 운동회였다. 아, 세월이 벌써 이리도 많이 흘렀을까. 이제 내년부터는 이 아담한 잔디 운동장에서 펼쳐지는 그 어떤 잔치에도 초대받을 수가 없으리라. 흐르는 세월을 탓하랴, 늦둥이가 없음을 탓하랴. 우리가 이사오던 해 두 아이의 전학으로 전교생이 87명을 기록하게 되었지만 그로부터 만 3년이 흐른 지금 전교생은 70여명에 불과하다. 여기에 유치원생을 합치면 겨우 90명을 넘을까. 그래서 운동회는 학생만이 아니라 학부모, 거기에 조부모까지 수를 더해야 게임다운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운동회 날이면 어른이고 노인이고 아이고 할 것 없이 모든 일을 접고 학교로 향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이쯤 되면 한나절 소일거리를 넘어 학교 행사를 행사답게 만들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도 없지 않을 터이다. 전교생 수야 도시 학교로 치자면 두 학급에 지나지 않지만 청군, 백군 없는 운동회가 무슨 재미랴. 적으면 적은대로 부족하면 부족한대로 전교생을 절반으로 나누어 청군은 ‘한라팀’이 되고 백군은 ‘백두팀’이 되어 응원하랴 경주하랴 분주하기만 하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이라 했거늘 달리기도, 장애물 넘기도, 풍선 터뜨리기도 함께 해야 하는 부모들 역시 상대편 부모가 누구 누군지 확인해두느라 두 눈을 번뜩인다. 팀에 맞추어 흰색과 파란색 옷을 입은 아이들과는 달리 학부모들은 제각기 다른 색깔 옷을 입은 탓에 미리 아군인지 적군인지 익혀놔야 제대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나도 열심히 익힌다고 익혀두었건만 발목에 묶은 풍선 터뜨리기에서 두 명의 백군 적수를 만나 그만 지고 말았다. 게임을 하는 동안 어찌나 큰소리로 웃고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쉴 정도였다. 말이 아이들 운동회지 동네 잔칫날이나 다름없는 하루였다. 재미도 재미지만 시골 학교 운동회의 진짜 매력은 인정(人情)에 있다. 그날은 누구나 한식구가 된다. 세 명이 동시에 학교에 다니는 집의 엄마는 엉덩이 붙일 틈 없이 바쁘게 마련. 이럴 땐 누구라도 엄마가 되어 그 집 아이 손을 맞잡고 함께 달리고, 춤을 춰준다. 말도 필요없고 새삼 부탁할 거리도 못된다. 지난 해 갑작스럽게 아빠를 잃은 동우는 엄마마저 건강이 좋지 않지만 그 또한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마을 엄마 아빠들이 돌아가며 동우 엄마 아빠 노릇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곳간에서 인심 난다고 했던가. 시골 인정(人情)은 점심시간에 활짝 꽃을 피운다. 빙 둘러앉아 서로들 싸온 김밥이며 과일들을 나눠먹고, 군것질할 돈을 달라고 칭얼대는 아이가 있으면 누구라도 주머니에 푼돈이 있는 사람이 기꺼이 주머니를 털어놓는다. 교사와 학부모들을 위해 학부모회가 성의껏 마련한 한치 물회는 서너 사람이 어우러져 먹을 수 있도록 한 낭푼씩 몫이 돌아온다. 귀한 한치 물회는 모처럼 학교에 진을 친 잡상인들에게도 한 낭푼씩 돌아간다. 모두가 배 부르고 가슴 훈훈해지는 것이 시골 학교 운동회인 것이다. 우리네 가운데 몇이나 우리의 손자들 운동회에 참여해 빨래비누 낚시 게임을 즐길 수 있을까. 우리네 아이들 가운데 몇이나 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살 것인가. 그때까지 이 학교는 사라지지 않고 그대로 버티고 있어줄 수 있을까. 그때도 공책 한 권 연필 한 자루에 입이 찢어지도록 좋아할 아이들이 있을 것인가. 내가 할머니가 되어서야 다시 초대받게 될 아름다운 가을 운동회여, 잠시 안녕. 조선희 /「마흔에 밭을 일구다」의 저자, 남제주군 표선면 토산리 제333호(2002년 10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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