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팡]‘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감귤 수확철 정신없는 일상 보내어쩌다 한가한 토요일 해질 녘, 찬거리를 사러 면소재지 매장에 들렀다. 뭐 신통한 찬거리가 없나 두리번거리는데 작업복 차림의 한 여자가 망설임없이 이것 저것을 장바구니에 담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바삐 움직이는 여자의 펑퍼짐한 엉덩이에는 풀물이 배어있고 반소매 옷과 팔뚝에 낀 토시 사이로 반뼘 남짓 드러난 맨살이 조금 썰렁해 보인다. 신고 있는 운동화를 보니 필시 훌쩍 커버린 아들녀석이 작아서 신지 못하는 것이 분명한, 까만색 학생용 운동화다. 여자는 고깃간에 들러 돼지고기를 사고, 가지런히 묶인 허리춤에만 띠포장이 되어있는 국수다발을 두어 개 사고, 어린 배추를 골라 장바구니에 넣고, 두부 두 모를 비닐에 넣어 장바구니 한 구석에 조심스럽게 넣었다. 한 걸음도 허투루 낭비하지 않고 장을 보고 나서 쌩하니 바람을 일으키며 매장을 빠져나가는 그 여자의 뒷모습에 겹쳐지는 것은 한 달쯤 뒤의 내 모습이었다. 본격적인 극조생 감귤 수확철, 여자는 이른 아침 자리를 털고 일어나 아이들 아침상을 대강 보아두고 과수원으로 향했을 것이다. 아니, 아까 장바구니를 든 여자의 엄지손가락에 끼워진 자동차 열쇠 고리로 보아 그 보다 더 이른 시각 감귤을 따줄 일꾼들을 태우고 왔을 것이다. 그리고는 일꾼들과 같이 감귤을 따다 과수원 한쪽에 불을 피워놓은 야외용 버너로 멸치국물을 내고 국수를 삶아 아침 간식을 해결했을 것이다. 방금 사간 저 돼지고기는 갖은 양념에 버무려져 내일 점심 일꾼들 밥상에 오를 것이고, 어린 배추를 데쳐 끓인 된장국도 한 자리를 차지할 게 분명하다. 두부 두 모는 바쁜 농사일에 지쳐 소홀해질 수밖에 없는 아이들 반찬 생각에 산 건 아니었을까. 이미 늦어버린 저녁 시간, 엄마를 더는 기다리지 못하고 끼니를 대충 때워버린 아이들이 여자는 얼마나 안쓰러울까.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는 몰라도 한눈에 읽혀지는 그 여자의 일상이야말로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너와 내가 다 아는, 바쁘기만 한 감귤 수확철 농촌 여자의 나날인 것이다.나도 그 여자의 본을 받아 주저함이 없이 두부와 어린 배추를 골라 장보기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 감귤을 가득 실은 트럭을 여러 대 만났다. 어떤 차는 감귤 컨테이너를 다섯 단으로 쌓아 실은 탓에 커브 길을 돌 때 바짝 뒤따르기가 겁이 났다. 과수원에 창고가 있다면 몰라도 우리처럼 집에 붙은 창고까지, 오늘 수확한 감귤을 다 실어 나르자면 저렇게 몇 번씩이나 왕복을 해야 했을 것이다. 감귤을 따는 일은 그래도 양반이어서 크게 힘 안들이고 할 수 있는 일이라지만-지난 해에 이어 올해도 우리 감귤 수확을 도와주시기로 한 옆 마을 삼촌 말씀을 빌자면 넥타이 매고도 할 수 있는 게 감귤 따는 일이란다-일꾼들이 바구니째 쏟아놓은 컨테이너를 일일이 리어카에 실어 날라 차에 싣는 일은 보통 맷집으로는 하기 어려운 중노동이다. 게다가 다시 차에서 내려 창고에 차곡차곡 쌓기까지 해야 하니 여자 품삯의 두 배는 주어야 하는 남자 몫의 중노동을 주인장 혼자 해냈다면 오늘 저녁 깡소주 한 잔 없이는 잠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 뻔하다. 그러고도 내일 비가 오거나 일꾼들이 약속을 어기지 않는 한 어김없이 오늘과 똑같은 하루를 열어야 할 것이다. 하루 뿐인가, 이제 시작인 것을. 작업복을 입고 잰걸음으로 걷는 여자는 죄다 내 자신 같고, 차가 기울어지도록 감귤을 실은 트럭을 모는 남자는 죄다 내 남편 같은 심정이 되는 때가 바로 이 즈음이다.조선희 /「마흔에 밭을 일구다」의 저자.남제주군 표선면 토산리제335호(2002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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