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수첩]답답한 가을 그리고 7

‘아, 정말. 태양고도 하나 재려고 이렇게 실험도구 만들고 운동장에까지 가야 하나?’출근하자마자 들은 짜증 섞인 소리의 주인공은 우리 반 주석이였다. 주석이는 영어로 일기를 쓰는 아이이다. 방학이 다가오면 주석이는 체험학습을 하러 뉴질랜드로 간다. 몇백만원을 싸들고 어학연수를 떠나는 주석이가 뉴질랜드에서 공부한 흔적으로 들고 온 것은 일기장 한 권이었다. 영어 일기가 듬성듬성 들어있는 일기장. “재미있었니”나의 물음에 주석이는 시큰둥하게 대답했다.“따분한 방학이었어요.”“어디 어디 돌아다녔니?”“그냥 방콕(방에 콕 박혀 아무 일도 안하는 것)하고 있었지요. 할 일도 없이 빈둥빈둥 놀다 왔어요.”“필요한 것을 사러 가게에도 안갔니?”“그냥, 사고 싶은 것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 알아서 줘요.”“그래도 기왕 간 김에 좀 돌아다니다 오지 그랬니?”“아. 귀찮은데 어딜 다녀요? 그냥 잠만 자다 왔어요.”수백 만원을 들여 먼 나라까지 간 주석이는 방학과제로 내가 내 준 ‘영어로 일기 쓰기’ 숙제만 겨우 했다고 하며 일기장을 내밀었다. 일기장이야 여기에서든 못쓰겠냐 싶었다. 그 이후로 주석이가 영어에 어느 정도 관심을 보이는지 지켜보았다. 그러나 주석이는 영어를 쓰는 일이 거의 없었다. 영어 시간이 돌아와도 다른 아이들보다 오히려 짜증내었다. 일기장에 여전히 영어로 일기를 쓰는 것을 제외하고는. 초등학교에 영어가 도입된 이후 4년여 동안 변한 게 참 많다. 집집마다 윤선생, 튼튼영어, 푸른영어 등 각종 영어 테이프가 쌓여가고 어학원에는 서너 살짜리 아기부터 주부들까지 등록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에서는 자료 준비의 많은 부분을 영어자료 제작에 투여한지 오래이다. 그렇게 자료를 준비하며 체계적으로 언어교육을 하는 노력을 초등학교 입문기에 우리 한글을 익힐 때 썼더라면 고학년이 되어서도 띄어쓰기, 맞춤법이 엉망인 어린이들이 양산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에 한숨이 나온다.주석이 엄마는 주석이와 주석이 동생의 영어 과외비로 매달 50만원 이상이 소요된다고 하였다. 그리고 방학동안 외국에 보낼 돈으로 한 달에 50만원씩 저축을 한다고 하였다. 나중에 물려주지 않고 지금 공부하는데 투자를 하겠다고 하였다. 영어 공부를 위해서만 한 가정에서 월 백만원을 지출하고 있는 것이다. 주석이 엄마처럼 국내외를 왕래하며 교육을 시키는 경우가 아니더라도 영어 개인과외와 학습지를 겸하거나 어학원과 학습지를 겸하는 집은 비일비재하다. 어학원이나 개인과외를 겸하면 2인 자녀의 경우 월 50만원은 족히 영어과외비로 들어간다. 그러면서 하나도 아깝지 않다는 말을 한다. 재산을 물려주는 대신에 필요한 때 교육을 시키는게 더 현명한 것이라는 충고까지 덧붙인다. 학습지 하나만 받으라고 하면 ‘다른 아이들은 다 어학원 다니는데 우리 아이만 안하면 뒤떨어질까봐’ 걱정이 된다고 한다. 부모가 뒷바라지를 잘 못해줘서 나중에 영어 부진아가 생기면 어쩌냐고 되묻는다. 아닌게 아니라 내년부터는 초등학교 영어 교육에 7차교육과정이 적용된다. 그것도 심화 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이다. 심화 보충형 수준별 교육과정이란 기본과정을 익힌 아이들 중에 평가를 실시하여 보충 과정을 받아야 할 아이와 심화과정을 받아야 할 아이로 구분하여 가르친다는 것이다. 학부모들은 수준별 교육과정을 학부모의 입장에서 해석한다. 영어도 이제는 시험을 봐서 성적순으로 등수가 나오고, 부진아는 남아서 보충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자녀가 부진아가 되게 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에 학원으로 개인과외로 아이들을 더욱 내몰고 있다. 더군다나 학습지 회사에서조차 ‘7차교육과정’ 운운하며 마치 과외를 받지 않으면 부진아가 되어버릴 것처럼 부모들의 영어 과외를 부추기고 있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7차교육과정을 ‘돈차 교육과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돈 있는 집 아이는 사교육비를 많이 들여서 심화반으로 가고, 돈 없는 아이들은 별도의 과외를 받지 않고 학교 교육만 충실히 받는데 기본이 튼튼하지 못해 고학년으로 갈수록 격차가 벌어져 영어부진아가 되어버린다는 것이다.요즘에는 영어 뿐만이 아니라 ‘전과목 과외 선생님’이 등장했다. 아예 일부 아파트 단지에서는 ‘7차 교육과정 수준별 학습에 대비한 전과목 과외’가 소그룹으로 성행하고 있다. ‘보충이’가 되지 않기 위한 부모들의 집념이 학교만큼 거대한 과외 학교를 만들어가고 있다. 정말 답답한 가을이다. 저 푸르른 하늘이 나의 가슴을 시원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은 답답한 교육현실 때문이다. 과외가 교육의 중심이 되면 가정과 학교가 동시에 붕괴한다. 우리들의 희망이 무너진다. 진정 아이들을 중심에 놓고 아이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교육과정이나 교육제도에 대하여 교육당국과 교사 그리고 학부모가 한데 모여 중지를 모아야 할 것이라는 위기의식이 가을을 느낄 수 없는 무거움으로 다가와 가슴을 짓누른다.박희순 /제주교대부속교 교사 제235호(2000년 10월 27일)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