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제주음식, 슬로푸드로서의 가치 재발견
자연 속도의 제주음식, 가정회복의 길잡이

바야흐로 '느림'이 대세다. 쫓기듯 바쁘게 살아온 현대인들은 휴식과 여유를 희망하며 느리지만 그래서 더 아름답고, 재미있고, 맛있는 것을 찾아간다.
그동안 '빨리 빨리'에 익숙해져 느림의 미학을 잊어버리고 살았음을 일깨운다. '올레 열풍'이 이를 상징한다. 천천히 걸어가는 도보여행의 진정한 의미를 찾아주고 있는 제주올레는 제주해안길의 아름다운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고 있다.
음식 또한 마찬가지다. 간단히 손쉽게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는 건강을 해칠 뿐 아니라 오랜기간 음식을 만든 이의 정성을, 먹을 수 있는 것의 감사함을 간과하게 만들었다. 이제 상업이익을 떠나 좋은 품질의 식품생산을 통해 건강의 참맛을 주는 슬로푸드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때다.
음식은 지역의 산물이자 일들의 흔적이다. 소박하다 못해 투박한 제주전통음식에 숨겨진 슬로푸드의 가치를 발견하고, 전통음식을 명품화하고 있는 도외 사례를 통해 제주음식을 세계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5차례에 걸쳐 모색한다. <편집자주>

# 과거로 회귀하는 '입맛'

땅 속에 묻어둔 항아리 안에서 꺼낸 잘 익은 김치를 듬성듬성 썰고 돼지고기를 먹음직하게 썰어놓은 칼칼한 국물맛이 일품인 '어머니 손맛' 김치찌개, 된장을 풀어 양파와 감자, 두부를 싹뚝 썰어 놓은 구수한 된장찌개. 쉰 보리밥에 누룩을 잘게 부숴 만든 '현대식 농축 요구르트' 쉰다리가 자꾸 당기는 건 왜일까.

입맛이 과거로 회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최근 몇년전부터는 청소년들의 체격은 커졌지만 상대적으로 체력은 떨어졌다는 소식이 단골 뉴스처럼 등장하고 있다. 패스트푸드(fast food)로 지칭되는 햄버거, 피자, 스파게티, 치킨 등 '손가락 음식'은 고열량 음식으로 체력을 오히려 비만을 초래하고 각종 성인병의 원인이 된다는 지적이 일면서 패스트푸드에 대한 대안이 요구되고 있다. 그런 패스트푸드의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는 것이 바로 '슬로푸드(slow food)'다.

'슬로푸드'는 어느날 별안간 생겨난 음식이 아니다.

산업화, 기계화 속에서 사람들의 생활패턴에 자리잡은 '빨리 빨리' 문화에서 생겨난 주문해서 바로 먹을 수 있는 패스트푸드의 반대개념. 즉 인공의 속도가 아니라 자연의 속도에 따라 생산된 먹을거리가 바로 슬로푸드다.

자연의 속도에 따르기 때문에 제철음식과 인스턴트 식품도 배척한다. 그런 기준으로 패스트푸드를 제외시키는 과정의 결론으로 남는 것은 우리 전통음식이다.

지역에서 생산된 제철 재료를 가지고 재래방식으로 만들어진 음식, 그것이 슬로푸드고 슬로푸드를 실천하는 움직임이 바로 슬로푸드 운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슬로푸드는 건강을 지키고 인격을 함양하며 전통음식을 보존, 전승시킬 뿐 아니라 농업을 회생시키는 환경운동과도 맥을 같이 한다.

# 자연 맛 살린 제주밥상 

그런 관점에서 한국의 된장, 간장, 고추장, 젓갈은 대부분 자연발효 식품으로 슬로푸드라고 할 수 있다. 제주전통음식 또한 슬로푸드 가치로서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특히 제주음식은 슬로푸드의 요건 중 제철 재료를 사용한다는 점에 크게 부합한다. 유전자 조작 농산물, 혹은 배나 비행기를 타고 국적도 불분명한 곳에서 수입되는 농산물로 만들어지는 패스트푸드와 확연히 다르기 때문에 믿고 먹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장점이다.

제주음식은 그야말로 자연 맛을 살린 음식이다.

제주사람들은 만들 요리를 생각하면서 식재료를 미리 구입하거나 계획을 세워 조리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그때 그때 얻을 수 있는 재료를 상황에 맞춰 조리했다. 온화한 기후로 사계절 야채가 풍부했고 산과 들, 해변에 다양한 신선한 식재료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양한 식재료는 식문화가 발달한 전주지방 280품, 오키나와 150품에 비해서도 월등히 많은 제주음식, 무려 470여 품수를 낳았다.

제주음식에서는 과거 선조들의 슬기와 기지도 엿볼 수 있다.

섬이라는 지리적 특성상 외지와의 인적, 물적 소통이 쉽지 않은 제주에서는 철저하게 절약할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제주도의 음식의 창차림은 반찬수가 많지 않고 조리가 간단하다. 척박하고 거친 환경을 극복하며 억척스럽게 살아야 했던 제주사람들의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식량이 귀하다보니 꼭 먹을 만큼만 만들어 먹었다.

각 가정의 기호나 생활정도 등에 따라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제주사람들의 밥상차림은 대체로 보리밥과 된장국, 김치, 젓갈, 생나물이나 익힌 나물 한 두가지가 기본이었다.

또 하나, 제주음식이 슬로푸드 정신에 입각한다는 것은 제주밥상에서도 잘 드러난다.

음식에 대해 생각하고 음식을 만든 사람에게 감사하며, 음식을 음미하면서 먹는 것이 슬로푸드의 핵심이라고 할 때 슬로푸드운동은 가정과 행복을 되찾고 식탁문화를 향상시키는 것은 물론 가정과 가족의 화합을 지키는 수단이된다. 남녀노소 구별없이 가족 구성원 모두 두레반상에 '낭푼'이라는 큰 그릇에 담아 공동으로 먹은 제주의 '낭푼밥상'역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는 토대가 됐다.

동네 꼬마들이 놀다가도 어느 집이고 들어가서 수저 하나만 더 꽂아 식사를 했던 제주사람들의 '넉넉한 인심'과 정(情)을 표현하기도 했다.

※ 슬로푸드 운동 = 1986년 이탈리아 로마에 미국의 맥도널드 햄버거가 진출하는 것에 반대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이탈리아 의식있는 소수가 시작한 슬로푸드 운동은 획일화, 표준화돼 가는 패스트푸드를 먹지말고 지역에서 생산되는 영양가 높은 토종식품을 먹으면서 전통을 보존하고, 서서 급하게 음식을 먹는대신 식사와 미각의 즐거움을 느끼자는 취지였다.
이후 1989년 프랑스 파리에서 슬로푸드 국제운동본부가 창설됐고 전 세계적으로 이 운동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사라지고 있는 로컬 푸드의 전통과 자신이 뭘 먹는지, 먹는 음식이 어디서 오는지, 어떤 맛을 내며 음식을 선택함으로써 세상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줄어드는 것을 막기 위해 환경과 맛을 중시하는 회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운영되는 비영리 단체, 슬로푸드 국제본부는 7월 15일 현재 132개국 10만명이 넘는 회원들이 참여하고 있다.
한국에서는 2001년 포르투갈에서 개최된 슬로푸드 세계대회에서 경상남도 남해군의 300년 전통의 죽방멸치에 관한 연구로 세계슬로푸드상을 수상하면서 이를 계기로 슬로푸드 한국위원회가 결성됐다.
슬로푸드 운동의 상징은 천천히, 의식하지 않고 나아가기 때문에 칼날 위에서도 베이지 않는다는,느림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 달팽이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