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집> 30 도예가 허민자

제주 현대도예 태동 산파역 1세대 도예가...제주 옹기작업 지속
변화무쌍한 제주 자연에서 영감 얻어...끊임없이 작품 세계 변화
모났으나 둥글고 거칠어 보이나 따뜻하고, 단순하나 웅숭깊은...  

▲ 작업중인 허민자 교수.
시청에서 제주대 가는 방향, 아라동 원신 아파트와 미화 아파트 사이로 들어오면 나오는 자그마한 다리를 지나 바로 첫 집이라고 했다. 잘 모르겠으면 다시 전화하겠다고 했더니 마당에 작품들이 놓여 있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거라는 대답이다. 맞았다. 큰 길을 금방 벗어났는데도 갑자기 숲에라도 들어온 듯 착 가라앉은 분위기가 인상적인 동네, 마른 내 위에 얹힌 자그마한 다리를 건너자마자 도예가 허민자 교수(제주대 산업디자인학부)의 집이 보인다. 허 교수 부부의 이름자가 적힌 문패도 달려있거니와 초록이 싱그러운 잔디마당 곳곳에 놓인 제주 항아리와 도예 작품들 또한 세상에 하나 뿐인 문패 구실을 하고 있었다.

“장작 가마를 묻을 수 있는 외진 곳을 찾아 이곳에 집을 지은 게 1988년이에요. 이 집터는 원래 감귤 과수원이었고, 지금 아파트들이 들어선 자리가 온통 숲이었지요. 숲에 안개가 자욱한 날이면 얼마나 행복하든지요. 남들은 무섭지 않냐고들 했지만 웬걸요, 금세 아파트들이 빙 둘러서더라고요. 그때가 정말 좋았지요.”

▲ 마당 한쪽에 전시되어있는 작품.
집 주변으론 삐쭉삐쭉 아파트들이 솟아 있었지만 집터의 경사를 그대로 살려 잔디를 가꾸고 돌을 박아놓은 어여쁜 마당에 들어서니 이곳이 어느 동네인가 싶을 만큼 고즈넉하기만 하다. 지금도 이러할진대 물경 20년 전이야 얼마나 고요하고 아름다웠을지는 굳이 허 교수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길게 뻗은 경사로로 이어진 마당을 살짝 비켜서 앉힌 단층짜리 건물 두 동. 하나는 갤러리 겸 작업실이고 하나는 살림집이다. 두 건물을 잇는 사이 공간, 살림집 앞의 탁 트인 공간, 텃밭 사이사이 눈길 닿는 곳은 어디고 허 교수의 작품들이 자리 잡은 야외 전시장이다.

▲ 최근 작품들 앞에 선 허 교수.
제주 도예 1세대로서 제주의 현대 도예를 태동시킨 허 교수의 작업실을 들여다본다. 비교적 넓은 공간에 클래식 음악이 흐르고 있다. 작업대 위엔 지금껏 매만지고 있던 작품이 하나, 테이블 위엔 오는 31일 정년퇴임 기념전에 맞추어 출간 예정인 도예작품집<許敏子陶藝> 교정본이 놓여있다. 작업대 위의 작품이야 아직 완성 전이니 앞으로 어떤 얼굴과 매무새로 태어나게 될지 가늠하기 어려우나 묵직한 교정본을 들춰보니 세밀하고 꼼꼼하게 교정을 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초기 작품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허 교수의 작품 세계가 한 권의 책에 담겨있다. 어찌 작품 세계뿐이랴. 그 숱한 시간 속에 명멸했을 고뇌와 희열이 동전의 앞뒷면처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예술가의 깊숙한 내면의 세계도 드러나는 것이 작품집일 터. 필생의 작업 산물을 작품집으로 품에 안은 예술가가 존경스럽고 부러운 이유이다.

▲ 사랑과 평화, 화해 메시지를 담은 종교적 작품들.
작업실 옆 공간은 작품집에 실린 작품들을 실체로 만날 수 있는 갤러리. 아, 겨우 발 디딜 틈만 빼고는 온통 작품이다. 그동안 학교와 집만 오가느라 작품 정리할 틈이 없었다는 허 교수의 변명 아닌 변명마저 부럽고 존경스럽다. 어찌 학교와 집만 오갔을 것인가. 그가 뿌린 씨앗으로 30년 세월 동안 제주 현대 도예는 튼실한 뿌리를 키워가는 중이고, 잊혀지고 스러져가던 제주 옹기는 다시 세상의 햇살 아래 그리고 우리의 시선 안에 들어올 수 있지 않았던가.

“한 사람이 작업한 게 맞느냐고 할 정도로 몇 단계를 거치면서 다양한 시도들을 해봤습니다. 30여 년 동안 말 그대로, 필(feel)이 꽂히는 대로 작업을 해온 셈이지요. 하고 싶은 것은 다 해봐서 여한은 없습니다. 한번도 제자리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를 했으니까요.”
 

▲ 살림채 앞의 널찍한 잔디마당은 그대로 야외 갤러리가 된다.
숱한 작품들을 일별해보니 문외한의 눈에도 몇 개의 단계와 시기가 읽혀진다. 미술평론가들의 분류와 분석에 따르자면, 제1기는 그가 처음으로 도예를 시작하던 1970년대. ‘전통적인 도자 형태에 현대적인 문양을 조각하거나 투각하며 서울대 미대(응용미술학과)시절 익힌 디자인 감각을 도자에 응용하던’ 시기에 해당한다. 제2기는 1983년 1년간 일본에 유학했던 시절과 귀국 후를 포함한 1980년대. 일본 교토시립예술대학에서의 한국의 떡살문과 파도문, 제주의 팽나무를 형상화한 도등(陶燈)작업과 귀국한 후 제주의 자연에 새롭게 가슴을 열면서 몰두한 ‘산’ 시리즈 작업이 이루어진 시기이다.

“변화무쌍한 제주 날씨에 따라 다양하게 바뀌는 한라산의 모습에서 끊임없는 조형 에너지와 창조적 영감을 받았습니다. 새벽안개에 젖어 신비하게 늘어선 숲 속의 나무들, 끝 간 데 없이 펼쳐진 가을바람 속의 억새 물결, 수없이 오버랩(overlap)되면서 여성적 자태를 드러내는 오름들은 제주에서만 느낄 수 있는 정취를 발산하지요. 그 정취를 제대로 표현하기 위해 사용한 것이 제주점토와 화산재, 송이 등이었습니다.”

제주의 돌(화산암)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1990년대는 제3기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현무암의 다양한 형태와 기공들을 변화시켜 만든 작품들과 주상절리를 이용한 조형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대포동이나 예래동 해안에서 볼 수 있는 주상절리형 암괴들이 자연이 만든 조형물이라면 그것들을 제주 흙으로 빚은 사각기둥으로 단순화시키고 중첩된 형태로 변환시켜 피라미드 모양으로 배치한 일련의 작품들은 허 교수 내면에 녹아든 제주의 신비한 자연 그 자체이다. 크기와 형태가 다른 기공들 사이로 빛이 새어 나오도록 한 현무암 도등 작업은 이 시기를 특징짓는 소산이기도 하다.

▲ 경사진 마당을 살려 작업실겸 갤러리와 살림채를 분리해서 지은 집 전경.
200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4기는 90년대 후반 방문교수로 1년간 미국에서 머물던 시기에 그 바탕이 이루어졌다. 인간적 주제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돌의 인체 형상화 작업을 시도하기 시작한 것. 제주의 돌들이, 주상절리형 돌기둥들이 서로 엉켜있는 모습은 영락없이 아기를 업은 어머니의 모습이었고, 서로 깊이 사랑하는 연인의 모습이었고, 인생의 길을 함께 걷는 가족의 모습이었다. 그래서일까, 이 시기에 만들어진 작품들은 우선 한없이 둥글고 따뜻하고 착하다. 그것들이 비록 네모반듯한 주상절리의 돌기둥 형태지만 서로를 의지하고 선 모습은 모난 데 없이 둥글고, 뽕뽕 뚫어 놓은 표면의 기공들마저 하나도 거칠지 않다. 십자가를 짊어지거나 혹은 가시관을 쓴 예수, 가슴에 사랑의 하트를 품은 성모상 등 최근 천착하고 있는 사랑과 평화, 화해라는 주제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님을 알겠다.

“이 모든 작업들을 하는 동안 끊임없이 병행해 온 것이 제주 옹기 작업입니다. 90년대 초반, 제주 옹기가 현대화 물결에 스러져가는 데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시작한 일이 제주옹기문화연구회를 만들어 매년 옹기전을 여는 데까지 왔습니다. 제주 옹기를 다시 현대 생활 속으로 끌어들이자는 의도에서 마련한 것이 지난해 열세 번 째 개인전 ‘제주옹기상차림전’이었지요.”

이제 정년을 맞아 작품에 쏟을 시간이 훨씬 많아질 허 교수가 어떤 변화를 꿈꾸고 있을지 궁금해진다. 내용이 무엇이든 간에 그 바탕은 한층 무르익은 제주 흙 사랑이 아닐까?   

<조선희 / 프리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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