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집32> 연극인 강상훈

▲ 극단 세이레 극장 강상훈 대표.
신제주 대로변 건물 지하차고에 연습실·소극장 마련

객석은 텅 비었지만 한창 연습중인 배우의 온기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자그마한 무대, 연극인 특유의 발성으로 나지막하고 굵게 울려 퍼지면서 단박에 극장을 압도하고 마는 배우의 대사, 작품 속에서와는 달리 지극히 비현실적인 모습으로 여기저기 나뒹구는 각종 소품들...나름대로 연극인의 작업실 풍경을 떠올리며 제주시내의 다소 번잡한 거리를 찾았다.

극단 세이레극장의 강상훈 대표를 만나러 가는 길, 지금까지 숱한 예술인의 작업실을 기웃거렸지만 연극인은 처음이다. 연극이라는 장르가 아직도 대중적이지 않거나 주변에서 연극인을 만나기가 쉽지 않거나 둘 중의 하나, 혹은 그 두 가지가 복합된 까닭이겠다. 대로변의 빌딩 지하에 마련된 극단 세이레 극장의 첫 인상은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던 피서객들이 자취를 감추고 난 늦여름의 바닷가 풍경처럼 좀 스산했다.

-단원들이 북적일 줄 알았는데 무척 조용하네요.
▲얼마 전 <황가 맹가>공연을 마쳤으니까요. 공연을 앞두고 연습을 할 때는 시끌벅적하지만 공연이 없을 땐 대체로 이런 모습이지요.
-단원은 현재 몇 명이나 됩니까.
▲5명으로 시작했는데 지금은 25명이 단원으로 등록돼 있습니다. 모두들 본업이 따로 있어서 활동하고 있는 단원은 소수이지요. 연극을 해봐야 의식주가 해결되지 않으니까요. 연극을 하려는 사람도 별로 없고 전반적인 지역 연극 풍토도 빈약하고요.

▲ 제주 연극의 발전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믿음에서 마련한 세이레소극장.
이곳에 극단의 연습실 겸 사무실 겸 단원들의 아지트를 마련한 것이 2004년. 우여곡절을 겪은 용담동 연습실을 임대료 부담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어 오갈 데 없게 되었을 때 지인의 소개로 짐을 맡겨두었던 곳인데 차츰 전기세 정도 부담하면서 공간을 빌려 쓰게 되었다. 전체 공간의 대부분을 연습실이자 소품 보관실로 쓰고 있는 터라 그다지 넓지는 않지만 강 대표는 이곳에서 거의 24시간을 보낸다. 먹고, 자고, 기획하고, 생각하고, 연습하고, 만들기를 되풀이하는 ‘절대적 공간’이 바로 이곳 연습실. 이야기를 나누고 보니 말을 아끼는 강 대표의 표정도 연습실 풍경만큼이나 스산함을 깨닫게 된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17년이나 극단을 이끌어오셨는데 대단한 것 아닌가요.
▲글쎄요. 그냥저냥 하다보니 세월이 그리 흘렀습니다. 그런데 연극이란 게 참 어렵습니다. 한 편 제대로 만들기도 어렵고, 제대로 보여주기도 어렵고...가끔은 왜 연극을 했나 후회가 되기도 합니다. 여기 연습실만 해도 그냥 전기세나 내면서 연습공간으로만 썼으면 별 문제가 없었을 텐데 2007년 소극장을 개관하다보니 임대료 부담을 떠안게 되었거든요. 소극장이란 것이 꾸준히 공연이 진행돼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질 못하고...일만 벌린 셈이 되었지요.

연극인이, 극단 대표가 소극장을 운영한다는 것은 결코 사치이거나 지나친 욕망은 아닐 터. 게다가 강 대표의 부인 정민자씨 또한 연극인이자 세이레 어린이극장 대표를 맡고 있는 동지이니 부부가 연극에 바쳐온 열정을 생각하면 극단을 운영하고 소극장을 마련하는 것쯤이야 지극히 당연한 열망일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이 평생 가야 한편 연극을 볼까 말까 할 정도로 아직은 대중과 거리가 있는 문화 풍토에서는 소속 단원의 생계유지나 적어도 적자가 나지 않는 소극장 운영은 ‘꿈’에 지나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그럴수록 소극장이 필요하다고 강 대표는 단호하게 역설한다. 소극장이 있어야 장기간 공연이 가능하고 그를 통해 배우가 훈련될 수 있고 작품의 질이 향상될 수 있으며 결과적으로 고정 관객을 확보할 수 있다는 것. 더욱이 제주의 경우 대학에 연극 관련 학과가 개설되어 있지도 않고 따라서 연극 관련 전공자가 드문데다 연극의 상업화 시스템이 갖춰져 있지 않아 악순환이 지속되고 있다는 지적이다. 사람 구하기 어렵고 돈 마련하기 어려우니 극단을 이끌어가기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강 대표의 말마따나 가끔은 진지하게 후회가 되겠다 싶기도 하다. 

-30년 가까이 외길을 걸어온 연극인이 가끔이라도 연극한 걸 후회한다니 참 가슴이 아픕니다.
▲연극인의 현실이 저만의 문제도 아닐 것이고 제주뿐 아니라 지방은 거의 마찬가지 상황일 겁니다. 지금 협회에 등록되어 있는 회원 극단이 5개 정도, 가입하지 않은 극단도 두세 개 정도 되는데 이 중에는 이름만 있고 활동은 하지 않는 극단도 있어요. 마케팅도 없고, 기획도 없고, 관객도 없는 상황...그러니까 한번도 만족할 만한 좋은 시절을 만나지 못했다는 회한이 남는 거지요.
-지금이 이렇게 힘들다면 처음 시작했을 때는 더 힘들었을 텐데 연극은 어떻게 해서 시작하셨나요.
▲1982년 극단 이어도에서 연극을 시작했는데 그 계기가 특별하지는 않았습니다. 대학 다닐 적에 친구도 없이 외톨이로 지냈는데 같은 과 선배가 사교성을 키울 필요가 있다며 연극을 해보라고 해서 찾아간 곳이 극단 이어도였고 가자마자 연습을 했어요. 그게 오늘에 이른 것이지요.

▲ 건물의 지하차고를 개조해서 사용하고 있는 극단의 연습실 겸 소품보관 공간.
척박한 풍토·배고픈 현실 속 17년간 극단 세이레 이끌어

극단 세이레극장은 1992년 창단되었다. ‘세이레 레퍼터리 컴퍼니’라는 이름으로 공연 제작·기획단체인 ‘예술기획 세이레’의 전속 극단으로 출발했다. ‘세이레’란 세 번의 이레(7일·1주), 곧 삼칠일을 뜻한다. 전통적으로, 아기가 태어나면 아기와 산모의 건강과 안녕을 위해 금줄을 쳐서 부정 탄 사람의 출입을 금지시켰던 기간이 바로 세이레였다. 소중한 생명이 온전하게 꽃피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최소한의 시간 세이레. 그런가 하면 사람이 되고 싶어 했던 곰이 환웅으로부터 받은 마늘과 쑥을 먹으며 인고했던 기간도 세이레였다. 새로운 존재로의 탄생을 위한 최소한의 인고의 시간 세이레. 강 대표가 극단 이름을 세이레로 정한 까닭이 자연스럽게 이해된다.

<위기의 여자(시몬느 드 보봐르 원작)>를 창단 공연작으로 무대에 올린 이래 <배비장전(이재현 작·강상훈 연출)>, <콜렉터(존 파울즈 작·강상훈 연출)>, <굿나잇 마더(마샤로먼 작·정민자 연출)> 등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을 공연하였다. <제주바다는 소리쳐 울 때 아름답다>,<늙은 부부 이야기>,<막차 탄 동기동창>, <북어대가리> 등은 그동안 치러진 전국연극제 제주특별자치도 예선대회 수상작들이기도 하다. 특히 <배비장전>은 프리뷰 공연 과정을 거쳐 만들어진 첫 작품으로 당시 새로운 시도라는 호평을 얻었다. 프리뷰 공연이란, 제작 마무리 단계에 연극관계자를 비롯하여 일반인에게 작품을 무료로 공개하는 것으로 그 평가에 따라 수정 보완하여 본 공연에 들어간다. 이는 연극의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상품으로서 연극의 가치를 높이기 위한 노력으로 1990년대 초반으로서는 획기적인 시도였던 것.      
-그래도 전업연극인으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 아닐까요.
▲전업 연극인이라는 말이 적절한 말일까요? 사람들이 보통 그렇게들 말하는데 전업 연극인이라면 연극을 해서 생계를 해결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질 못하잖아요. ‘전업’으로 매달려 있기만 할 뿐이지요. 이것저것 혼자서 다 하면서...
-상황이나 현실이 나아져서 정말 이것저것 다 하지 않아도 된다면, 맨 나중에 하고 싶은 딱 한 가지는 무엇입니까.
▲아, 이것저것 하지 말아야 되는데...만일 이것저것 하지 않아도 된다면...
연기를 하고 싶어요. 정말 연기, 그것에 도전해보고 싶어요.

<조선희/프리랜서>

#본 기획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아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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