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집35> 사진작가 김옥선

▲ 이중섭 창작 스튜디오에서 만난 사진작가 김옥선씨.
여성↔이방인 커플↔제주 속 외국인으로 주제 확산...주관심사는 ‘사람’

여자가 방 안에 서 있다. 마치 금방이라도 외출하려는 듯 화장을 곱게 한, 안경마저 낀 얼굴이지만 몸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발가벗은 채이다. 젖가슴은 살아온 세월만큼이나 축 쳐져 있고, 오목하게 들어간 허리조차 없이 뱃살은 불쑥 튀어나와 있고, 평생 몸무게를 지탱해온 다리는 이제 버거운 듯 바깥으로 휘어있다. 벗은 여자의 몸, 그러나 야하지 않다. 당당하게 혹은 무심하게 카메라를 응시하는 여자의 시선 때문인가, 여자가 서 있는 방안의 풍경이 낯익어서인가, 지금까지의 여체 누드 사진에 대한 편견이 눈 녹듯 사라지고 없다. 그냥 벌거벗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여자의 몸일 뿐이다. 사진의 타이틀은 <방안의 여자(Woman in a room)>이었다. 그리고 작가는 김옥선씨.
 
처음에는 그 김옥선씨가 서귀포 이중섭 창작 스튜디오에서 작업 중인 김옥선씨인 줄 몰랐다. 지루했던 장마가 걷히려는지 하늘이 유난히 맑고 푸르러 마치 가을 같은 날, 길을 나섰다. 이중섭 창작 스튜디오 5층에 자리 잡은 김씨의 작업실에 들어서자마자 전면의 유리창 한가득 서귀포 바다가 출렁이고 있다. 검정색 유리 창틀이 그대로 액자가 되는, 풍경 그림 한 점이다. 별 장식이 되어 있지 않은 작업실은 그래서 더욱 멋스러웠다. 한쪽 탁자 위에 가지런히 놓인 작품집 몇 권과 벽면의 몇 점 포스터만으로도 충분한 장식이다. 거기에서 다시 만나게 된, 예의 여체 사진 작품들...충분히 반가웠다.

▲ 전면의 유리창으로 보이는 섶섬.
“벌써 제주에서 14년째 살고 있습니다. 제주시에서 7년을 살았고 서귀포에서 7년째 살고 있는 건데요. 사람들이 곧잘 묻습니다. 서귀포라서 작업이 더 잘 되지 않느냐고...하지만 특별하게 서귀포라서 작업이 더 잘 된다기보다는 서귀포에 살고 있기 때문에 그에 맞춰 작업한다는 게 제 대답입니다. 서울에 살고 있다면 역시 서울에 맞춰 작업을 하고 있을 거거든요. 그런데 이곳은 참 좋아요. 올 1월에 입주했는데 개인 스튜디오가 없는 작가에게는 참 좋은 기회이지요. 집과 떨어져 있으니 온전히 작업에만 몰두할 수 있으니까요.”

서귀포에 살기 때문에 특별히 작업이 더 잘 되고 말고 할 게 없다는 그의 대답이 참으로 정직하게 들린다. 작품을 보건대 그의 절대적인 관심은 일정한 지역이나 자연에 갇혀 있지 않고 ‘사람’에 꽂혀 있는 탓이다. 때문에 그가 어디에 살건, 어디에서 작업하건 하등에 상관이 없다는 말이 맞을 게다. 오히려 그가 찍어오고 있는 ‘사람’들을 면밀히 살펴보면 그는 이미 지역을 초월한 지 오래다. 처음 시작은 ‘여자’였다. 그 ‘여자’가 살아가는 방에서 발가벗고 선 초상을 찍은 것이 곧 <방안의 여자(Woman in a room)>. 이 작업으로 연 1996년 첫 개인전에 대한 반응은 역시나 대체적으로 두 가지였다. 낯설다 혹은 당혹스럽다는 쪽이거나 여성 누드에 대한 선입견을 떨치게 해주었다는 쪽이거나. 이내 그의 시선은 ‘여자’에서 ‘이방인(외국인) 커플’로 옮겨간다. 한국 여성과 서양 남성 커플, 동양 여성과 서양 남성 커플들이 제각기 문화와 정서의 차이를 안고 살아가는 모습을 카메라에 담고 인터뷰를 해나간 작업의 타이틀은 <해피 투게더(Happy together)>.

▲ 촬영 도구들이 놓인 작업실 내부 모습.
독일인 남편과 14년 전 정착, 이중섭 창작 스튜디오에 작업실 마련

“외국인이기 때문에 우리 사회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기도 했을 것이고 외국인이기 때문에 때로는 내국인보다 더 대우를 받은 적도 있었을 겁니다. 말하자면 우리 사회는 외국인에 대해 균형 잡힌 시각을 갖고 있다고 보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는 거지요. 그렇다면 외국인과 일상을 같이 하는 한국인의 삶은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소파에 거리를 두고 앉은 서양 남성과 한국인으로 보이는 동양 여성 커플은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는다. 여자는 만삭의 배를 두 손으로 감싸며 카메라를 응시하지만 남자의 시선은 다른 곳에 머물러 있다. 먹음직스러운 과일접시를 앞에 두고 식탁에 나란히 앉은 커플의 사진에서도 역시 동양 여성은 경직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지만 서양 남성은 숫제 여자에게서 방향을 돌린 채 턱을 괴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다. 심지어 자신의 무릎에 앉아 등을 감싸 안은 동양 여성에게 한 치의 곁도 내주지 않고 시선을 떨어뜨린 채 앉아 있는 서양 남성의 뒷모습도 있다. 마치 언어와 관습과 취향과 사고방식의 본질적인 차이를 안고, 그것들을 감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이방인 커플’들의 소통 부재의 현실이 손에 잡힐 듯 다가온다. 사진 속의 커플들에게 굳이 행복하냐고 물을 까닭은 없어 보인다. 작가는 다만 이방인 커플들의 삶을 재구성해보일 뿐이고 그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지, 그들의 삶의 실제가 어떠한지는 작품을 보는 사람들이 받아들여야 할 몫인 까닭이다.

그리고 <함일의 배(Hamel′s Boat)>. 지난 해 제주현대미술관에서 동명의 전시전을 가졌고, 100페이지가 훨씬 넘는 사진집으로도 출간한 이 작업은 순수하게 제주의 자연을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수많은 외국인이 홀로, 혹은 커플로, 혹은 집단으로 등장하며 제주와 어우러져 살아가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함일’은 350여년 전 일본으로 향하던 중에 난파하여 제주에 표착한 네덜란드인으로 후에 13년간의 한국 생활을 표류기로 남겨 한국에 관한 최초의 서양 저술인이 된 하멜의 한자식 이름이다.

▲ 유리 창틀이 액자 구실을 하는 서귀포 앞바다 풍경 한 점.
“이방인 커플에서 나아가 한국에서 살고 있는 외국인에 대한 작업을 해보고 싶었어요. 주로 제주도에 살고 있는 외국인을 카메라에 담았는데, 외국에서의 삶, 외국인으로서의 삶, 그 가운데서도 제주에서의 외국인으로서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의도였어요. 작업하면서 느낀 건데, 그들은 고국이나 타지라는 공간에 갇혀있지 않았어요. 제주에 살면서 제주의 산과 바다를 즐기고, 우리의 문화를 즐겨 배우려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요. 이 과정에서 오히려 그들과 우리는 참 많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던 것 같아요.”

이 일련의 작업들이 사실 작가의 실존과 무관하지 않다. 그의 남편은 독일인으로, 서울 태생인 김씨가 제주에 정착하게 된 것도 남편이 제주대 독일학과 객원 교수로 오게 되면서부터였다. 많은 부분에서 서로 다른 외국인 남편과 같은 공간 속에서 공동의 일상을 영위해나가는 작가이기에 연작들 속에서 드러나는 이방인들의 무심한 듯하기도 하고 거리감을 두려는 듯한 시선을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요즘 <함일의 배>의 연장선에서의 촬영 작업을 하고 있다는 김씨. 제주에서의 이방인들의 소소한 일상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고, 나아가 제주라는 지역사회에서의 외국인의 사회적 위상을 표현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 보다 내면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아마도 그의 바람은 이뤄질 것이다. 전쟁을 피해 서귀포에 피난 온 화가 이중섭이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절을 보냈듯이 섶섬이 보이는 언덕빼기에 자리한 이중섭 창작 스튜디오 공간은 분명 김씨에게도 일생 가운데 가장 열정적인 작업을 이뤄내도록 기운을 불어넣어 줄 것이기 때문에......     

<조선희/프리랜서>

#본 기획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이 기금을 지원받아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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