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의 집36> 서양화가 홍보람

제주에서의 작업 <상상(想象)전>으로 펼쳐...‘관계’와 ‘소통’ 중시

▲ 최근 다섯번째 개인전을 연 서양화가 홍보람씨.
“제주의 자연은 머릿속에 떠돌던 따로따로의 생각을 이해하도록 도와주었지요. 예를 들어 어떻게 하나가 다른 하나와 만나 작용하는지(용암과 물의 만남으로 땅의 모양이 만들어진 것처럼), 서로가 어떻게 서로를 내포하는지(물과 뭍의 관계처럼), 서로가 어떻게 서로의 형태에 영향을 미치는지(파도에 씻기는 돌의 모양과 돌에 의해 생기는 파도) 등 이 생각의 과정을 통해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해 조금씩 이해해가고 있습니다.”
 
지난 8월 제주시 아트스페이스 씨에서 다섯 번째 전시회 <상상(想象)전>을 연 서양화가 홍보람 씨(31)의 작가노트의 일부를 보면 그는 무엇보다도 ‘관계’와 ‘느낌’에 천착하고 있는 듯하다. 전시회에 내놓은 일련의 파스텔 작품들을 보면 이러한 추측이 그다지 틀리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세 개의 물방울이 서로 겹쳐진 듯 어우러진 작품에 붙여진 제목은 ‘공존,-서로가 서로를 포함하고 있는’이다. 마치 인체의 안구(眼球) 같기도 하고 두 그루의 나무뿌리가 위아래로 포개진 듯한 그림에는 ‘나뉘고 나누어지다 다시 만나는’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그런가 하면 ‘물과 용암과 땅의 느낌’, ‘섬의 느낌-물로 된 벽’, ‘담고 담긴 에너지의 느낌’, ‘솟아오르는 느낌’ 등 작가의 내면에서 생성된 그 어떤 느낌들을 형상화한 그림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런데 이들 그림이 절묘하게도 그 무엇인가, 그 어딘가 제주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고 있다. 그러고 보니 전시회 타이틀도 좀 특이하다. 통상적으로 쓰는 ‘상상(想像)’이 아니라 ‘상상(想象)’이 아닌가. 왠지 범상치 않다.

▲ 홍씨는 대상의 모호한 이미지를 표현하기 위해 파스텔을 즐겨 사용한다고.
순 서울내기인 그가 제주에 내려와 작업하고 있는 서귀포의 이중섭 창작스튜디오를 찾았다. 제주에 연고가 없는 탓에 작업실 겸 숙소로 쓰고 있는 스튜디오의 한쪽에는 매트리스와 지퍼가 닫힌 빅 사이즈의 여행용 트렁크 두 개가 놓여있고 창가에는 기다란 작업용 책상이 놓여있다. 벽면에는 한창 작업 중으로 보이는 파스텔 작품이 두 점 걸려있고 다른 쪽 벽에는 알듯 모를 듯 세밀하게 그려진 마인드맵이 여러 장 걸려있다. 뭔가 평범하거나 단순하지 않은 속내를 지닌 젊은 화가의 방다운 풍경이다. 우선 그에게 전시회 타이틀이 ‘상상(想像)’이 아닌 ‘상상(想象)’이라고 타이틀을 붙인 까닭을 묻는다.

“전문가가 아니어서 잘 모르겠지만 ‘생각의 꼴’을 드러내는 의미로서 상상(想象)이라고 붙인 겁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묻는 나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하는 생각의 기원은 무엇인가 등등 내 생각의 방식을 표현하자니 언어의 기원(어원)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책을 들여다보았지요. 결국 언어라는 것은 자연의 모양이나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고 개념이라는 것은 형상화에서 비롯되어 확장된다는 것을 깨달았어요. 그림은 곧 말이고 그것은 곧 생각인 거지요. 거기서부터 형상화가 시작되는 거고요.”

▲ 작업실에서의 홍씨.
예술적 감수성과 열정을 뛰어넘는 이지(理智)가 번득인다. 그는 단순히 어떤 대상에 대한 내면의 ‘느낌’을 표현하고 전달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대상을 포함한 ‘세계’와 ‘나’와의 관계를 알아가는 방식의 하나로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화가만은 아니다. 가수이기도 하다. 그것도 2집(흰 코끼리 같은 언덕·2007)까지 낸 언더그라운드 밴드 ‘포츈 쿠키(Fortune Cookie)’의 보컬이다.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가수가 노래를 부르는 것이나 결국은 나와 세계의 소통을 추구한다는 본질은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는 그이기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 싶다.

자신과 세계와의 소통 방식을 찾아 그림과 음악을 넘나드는 그는 참으로 넘치는 열정과 모험정신을 지닌 듯하다. 이렇듯 ‘관계’ 못지않게 ‘소통’을 중시하는 그답게 5년 정도 몰두했던 작업이 미술의 소통 방식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러한 고민은 시민들과 함께 만들며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지방 자치단체의 공공미술 프로젝트 참여로 이어졌다. 해가 거듭될수록 바라던 바와는 달리 일상은 너무 바빠졌고 스스로 그림을 그려 사람들과 소통해야 하는 작가로서의 리듬이 엇나가기 시작했다. 정작 그림을 그릴 틈을 내기 어려웠던 것. 그러다 지난해 미국 버몬트의 창작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할 기회가 주어졌다. 비로소 그는 자연 속에서 오로지 그림 그리기에 몰두할 수 있었다.

“미국에서의 시간은 내가 왜 미술을 하는가? 무엇을 알고 싶은 것인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를 알게 되는 게 무척 중요한 계기를 마련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창작행위에 있어서 자연이 얼마나 좋은 영향을 미치는지 실감했어요. 그래서 돌아와서도 그런 환경을 열심히 찾았던 거지요. 자연을 통해서 나를 되돌아볼 수 있는 환경...그러다 제주가 보였어요. 망설임 없이 이중섭 창작 스튜디오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된 거지요.”

꽉 차있으면서 텅 비어있는, 끊임없이 쌓이고 치워지는 작업실 갖고파

그러나 제주에서의 출발은 녹록치 않았다. 올 1월 쌩하고 추운 한겨울, 텅 빈 스튜디오에 첫 번째로 입주하고 보니 모든 것이 낯설어 적응이 쉽지 않았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곳에서 과연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이대로 짐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날마다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그래서 석 달 동안 오직 그림만 그렸다. 지금 이때가 아니면 안 된다는 오기가 생겼고 하루 24시간 작품과 대면하면서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이 작업의 결과물이 고스란히 <상상(想象)전>으로 되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 홍씨를 비롯한 많은 타지 출신의 예술가들에게 보금자리를 내주고 있는 이중섭 창작스튜디오의 외관.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힘이 되어주는 것이 마인드맵입니다. 뭔가 한 가지에 몰두하다보면 길을 잃어버리기 쉽거든요. 자꾸 까먹다보면 실수하게 되고요.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왜 하고 싶지? 어떻게 하지? 라는 질문을 스스로 던지고 그것을 ‘마음의 지도(마인드맵)’으로 그려놓으면 길을 잃을 염려가 없지요. 아, 그래서 내가 이 작업을 지금 하고 있구나 늘 확인할 수도 있고요.”

벽 여기저기에 붙여놓은 ‘마음의 지도’는 이를테면 하고 싶은 일이 너무도 많은 그에게는 없어선 안 될 ‘나침반’같은 것이라는 뜻이다. 이 역시 단순히 망각하지 않기 위해 메모해놓은 것이 아니라 일종의 자신과의 소통방식이라는 의미와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는 ‘마음의 지도’ 그리기 작업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한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도 했다. 도시 곳곳에 숨어 있는 소중한 기억을 들춰내 사람들 간의 보이지 않는 연결고리를 만든다는 취지로 ‘마음의 지도 프로젝트’를 2002년 핀란드 유학시절부터 시작하여 일본 후쿠오카와 서울 각지에서 진행했던 것.  

인터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그가 혼자서 부정기적으로 펴내고 있는 잡지 ‘바쁜 벌 공작소(Busy Bee Works)’를 몇 권 건넨다. 거기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나는 계속 떠돌아다니며 작업하고 싶고, 나의 작업실은 거창한 공간이 아니라 앉을 수 있는 자리와 내 앞의 책상 하나에 만족하고 싶다. 언제나 무언가로 꽉 차있으면서 텅 비어있는, 끊임없이 쌓이고 치워지는 공간-작업실.”

<조선희/프리랜서>

#본 기획은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기금을 지원받아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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