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경탐방](53)서홍동 분토왓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오아시스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살기좋은 남쪽나라, 서귀포시가 아름다운 이유는 곳곳 발길 닿는 곳마다 탄성을 자아내게 하는 비경들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 관광지라는 명패만 달지 않았지 어디에 견줘도 뒤지지 않을 풍광들이다. 다만 빨리빨리 흐름 속에 차창밖으로 지나쳐버렸을 뿐이다.
  느릿느릿 걸어가도 되는 느림의 사회였다면 놓치지 않았을 풍광들, 서귀포신문은 숨가쁘게 돌아가는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놓치고 있는 아름다운 서귀포의 오아시스, 비경을 20여회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 가을풍경하면 뭐니 뭐니 해도 억새의 은빛물결을 빼놓을 수 없다.
바람물결이 일렁이는 대로 휘청거리는 것 같지만 그 자태가 자못 우아하다.

청명한 하늘, 스산한 바람, 낙엽, 고독, 코스모스… 오곡이 익어가는 가을을 상징할 때 빠질 수 없는 것 또 하나가 가을 은빛물결의 억새다. 시원한 가을바람이 살랑살랑 코끝을 간질이면 발밑도 가을나들이 가고파 근질거린다.

태양이 이글거리는 지난 여름까지 시원한 물을 찾아 바다로 찾아 떠났다면 분위기 있는 가을은 호젓한 산이 있는 곳으로 방향을 돌려 볼 만하다.

높아진 하늘과 하늘 아래 도시풍경이 내려다보이고, 억새가 춤추고, 알알이 들어찬 밤을 줍고, 전설이 살아 숨 쉬는 곳으로 떠나는 가을소풍.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들뜬다. 서귀포 동홍동 한진주유소 옆 골목을 따라 산록도로 변에 있는 분토왓이 나오기까지 4㎞구간은 짧은 시간 적어도 3가지 이상 가을소풍의 재미를 만끽할 수 있는 곳이다.

▲ 서홍로에서 분토왓까지 가는 길에는 지혜로움이 솟는다는 샘, '지장샘'이 있다. 이곳에서 만나는 '가을의 전설'은 또다른 여유를 준다.
분토왓은 지형이 오목한 분지 같은 밭이나 말을 가둬 말똥이 많이 쌓였던 밭을 이르는 곳을 말하는데 중산간도로에서 출발해서 그곳에 도착하기까지 재미가 쏠쏠하다. 단, 드라이브를 추천한다. 가파른 비탈길이기 때문에 걷어서 가는데는 무리가 따른다.

# 지혜로움이 샘솟는 지장샘 찍고

그 첫 번째 재미는 살아있는 전설, 지장샘 이야기다. 한진주유소와 기아자동차 서귀포대리점 사이에 난 길을 따라 500m정도 가면 기와를 덮어쓴 지혜로운 샘이라고 알려진 지장샘(智藏장)이 나온다.

지장샘은 고려 예종때(서기 1110년경) 송나라에서는 제주지역 십삼혈을 막기 위해 찾아온 호종단을 따돌리고 지혜롭게 물을 지켜낸 한 농부의 이야기를 따라 이름을 지장샘이라고 부르고 있다.

지장샘에 얽힌 이야기를 간추리면 고려시대 탐라에 인재가 태어난다는 풍문이 송나라에까지 나돌았다. 송나라 조정은 압승지술이 능한 호종인을 시켜 탐라에 있는 십삼혈을 모두 막으라고 명한다. 호종단은 처음 지금의 남원읍 의귀리를 거쳐 당시 홍로에 있는 샘을 찾아 나섰다. 그러나 호종단이 홍로에 닿기 이전 백발노인이 나타나 점심그릇인 행기에 물을 담아 숨기라고 하자 그대로 따른다. 이윽고 호종단이 개 한 마리와 홍리를 찾아 행기물을 찾아 뒤지는데 이 때 개가 행기를 숨겨둔 곳을 찾아 수맥을 끊으려고 하자, 농부는 개가 점심을 훔쳐 먹으려고 한다고 꾸짖으면서 위기를 모면한다.

결국 호종단이 제 풀에 지쳐 돌아가자, 농부는 행기물을 바닥에 부었다. 그러자 거기서 맑은 물이 흘러나와 지금의 지장샘이 생겼다.

이렇게 농부가 지혜롭게 감춘사실이 알려지면서 이곳 샘의 이름이 지장샘이 됐다. 특히 지장샘물은 솟아나는 양이 뚜렷하지도 않고 항상 물의 양이 그대로인양 조용히 흐르기 때문에 이곳 지역사람들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장샘물만큼만 살라는 말을 해왔다. 크게 부자도 바라지 않고 아주 가난해지는 것도 말고 평범하게 보통 삶을 가지고 싶다는 주민의 의식을 나타낸 말이다.
 

▲ 비탈진 오르막길을 오르는 느낌이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하다.
# 서귀포의 롤러코스터 를 타고
 
지장샘 전설을 이해하고 1㎞ 정도 올라가면 이때부터 서귀포시내 전경이 한 폭의 그림처럼 펼쳐진다. 그렇다고 긴장을 늦춰서는 안 된다. 지대도 높지만 구불구불 비탈길이어서 마치 롤러코스터 타는 기분이다. 4㎞ 길이의 코스지만 자칫 지루함을 느끼지 않을까 자연이 배려한 것만 같다.

롤러코스터를 타는 스릴감과 짜릿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다시 1㎞를 가면 길 위에 무수히 떨어진 밤송이를 볼 수 있다.

가을 속을 더 깊숙이 들어선 느낌이다. 차에서 내려 잠시 쉬어갈 시간이다.

시내보다 더 차가워진 가을 공기를 마시며 비로소 가을 속에 있음을 실감한다. 두발로 밤송이를 쫙 벌려 조심조심 황갈색의 밤을 꺼내는 재미란 돈 주고도 사지 못하는 가을의 선물.

▲ 알알이 들어찬 밤은 더 깊숙한 가을로 초대하는 듯하다.
밤나무가 한 두 그루밖에 없기 때문에 많은 주울 여건도 되지 않지만, 이 코스의 마지막 묘미를 위해 다시 움직여야 한다.

밤나무가 있는 곳에서 다시 1.2㎞정도 오르면 이제 억새의 향연이 시작된다. 잘 왔다고 환영하듯 길 양쪽으로 늘어서서 손짓하는 억새는 보는 것만으로 황홀경이다.

# 은빛 억새숲에서 보는 황홀경

이 드라이브의 코스가 시작되는 지장샘 부근이 가을의 문턱이었다면 이곳은 가을의 절정이다. 한켠에 주차를 하고 올라온 길을 뒤돌아보면 깜짝 놀란다. 억새군락지 뒤로 서쪽 제지기 오름에서부터 동쪽 군산까지 서귀포시내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면 무릇 세상을 호령할 수 있는 왕이 된 것 같은 묵직한 기분이 든다.

▲ 서홍로를 따라 4㎞를 오르면 산록도로가 나오기 직전 분토왓에 당도한다. 이곳에서는 서귀포시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억새가 일렁거리는 가을, 서귀포에서 제주시로 가는 길, 516도로와 서부관광도로를 계획하고 있다면 우선은 한진주유소 옆으로 난 서홍로를 따라 분토왓까지 가서 판단해도 늦지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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