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십리글수레]記憶의 창고

어렸을 적 고향집에 서너 평쯤 되는 창고가 하나 있었다. 지금은 헐려서 흔적도 없지만 가끔 그 창고의 모습이 떠오르곤 한다. 뻑뻑해서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억지로 밀고 들어가 보면 온갖 잡동사니 물건들로 창고 안은 꽉 차 있었다. 부러진 삽, 이 빠진 톱, 전정가위, 발동기 벨트, 추 없는 저울, 분무기 밸브 등 못쓰는 연장에서부터 구부러진 쇠못과 나사들을 모아놓은 함석통, 헌 옷을 쟁여 넣은 나무상자에 이르기까지 목록으로 작성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물건들. 창고 안은 항상 어두컴컴하였다. 그곳을 떠올릴 때마다 인간의 기억도 그 창고와 흡사하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기억도 그 창고 안처럼 늘 어두컴컴하고, 불확실하고, 난삽하기 때문이다. 쓸 만큼 쓴 것들이어서 그런지, 창고 안의 물건들은 도무지 온전한 놈을 찾아보기 어려웠다. 그것들은 부속품이나 반제품 수준으로 분해되어서 창고 밖의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기묘한 단위(units)로만 존재한다. 그들이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은 오직 창고 안뿐이다. 아버지는 가끔 그 불가해한 단위들을 이리저리 재결합하여 창고 밖의 세계로 끄집어내곤 하셨다. 부서진 조각들이 모여서 의자도 되고 사다리도 되고 손자들의 장난감도 되었다. 물론 그 부속들이 지녔던 원래의 모습은 아니었다. 우리의 기억도 이렇게 창고 밖으로 나온다. 기억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원형과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기억은 때때로 선명하지만 대개는 불분명하고 모호하다. 기억의 창고와 고향집 창고, 무엇이 다를까. 고향집 창고는 문이 하나였지만 기억의 창고는 문이 수백, 수천 개다. 그 문은 하나 하나가 독립된 자동문처럼 저절로 열렸다 닫혔다 한다. 어떤 문은 굳게 잠겨 열릴 줄 모르고 어떤 문은 오가는 바람에 덜컹거린다. 기억의 창고 안에서 기억의 단위들은 기온과 습도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촉매를 만나면 활성화하여 형체와 성질이 바뀐다. ‘사랑은 움직이는 것’이라는 광고의 문안처럼 기억이야말로 움직이는 것. 그래서 기억은 믿을 것이 못되고, 사람들은 ‘문서화’ 또는 ‘기록’이라는 저장 방법을 고안해내었을 것이다. 기억은 과거의 어떤 사실을 기록해 두는 장치라기보다는 ‘과거-현재-미래’로 이어지는 맥락을 유지시켜 주는 나침반이나 풍향계에 가까운 듯하다. 지금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앞에 있다고 상상해 보자. 이 사람은 말하고 생각하는 기능은 정상이지만 자신의 출생과 성장과정에 대한 기억을 잃어버렸다. 그의 눈에는 현재의 세계가 어떻게 보일까? 여기 저기 까맣게 지워진 구멍과 자국들이 보일 것이다. 과거라는 지층으로부터 현재의 지상으로 기억의 싹이 얼굴을 내밀고 있던 구멍이다. 그가 불편한 것은 기억 상실이 아니라 맥락 상실 때문이다. 우리는 사실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며 산다. 그래도 사는 데 큰 불편은 없다. 소소한 기억들은 잊혀져도 맥락은 살아있기 때문이다. 농부의 아들로부터 현재의 삶으로 이어지는 맥락을 유지할 수 있다면 뿌리인 고향을 떠나 객지를 떠도는 삶이 크게 어그러지지는 않을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모두가 기억상실증 환자가 아닐까? 태초로부터 이어져온 맥락, 전생의 기억을 송두리째 잃어버린. 현재욱/전 커뮤니케이션북스 부사장 ▲약력/서귀포 출생·중앙대 신문방송과 졸·(주)엘지애드 차장, (주)킴벌리안 국장·지식공작소 및 커뮤니케이션북스 부사장·현재 사업 준비 중. 제361호(2003년4월24일)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