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사의 한글편지는 실사구시 실천자

[추사 김정희의 예술세계 조명 세미나](사)제주전통문화연구소는 지난 11일 제주시 교육청 2층 강당에서 추사 김정희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세미나를 열었다.이날 세미나에는 8년 2개월간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추사 김정희에 대한 관심을 입증하듯 학계, 교육계, 미술계 등 다양한 계층의 인사가 참석한 가운데 한림화(소설가)씨의 사회로 유홍준 영남대 교수, 윤치부 제주대 교수, 이태호 전남대 박물관장, 조규백 제주산업정보대 교수의 주제발표가 이어졌다.또한 이에 따른 토론자로는 문무병 제주전통문화연구소장, 오성찬 소설가, 강요배 화가, 심규호 제주산업정보대 교수가 나섰다.추사 김정희는 1840년 제주도로 유배돼 8년 2개월간 대정현에서 유배생활을 했다. 제주도 유배생활은 추사 김정희에 있어 추사체를 완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독자적인 예술세계를 완성할 수 있었던 제주에서의 유배생활과 추사 김정희의 인연을 기리기 위한 이번 세미나의 주제발표를 간추려 소개한다.▲‘추사 김정희의 예술과 그의 패트론’<유홍준 영남대 교수>김정희는 19세기에 활동한 예술가로서 매너리즘에 빠진 조선의 화풍에 국제적인 감각의 새 바람을 일으킨 장본인이다.우리 역사상에 있어 세계적 석학의 반열에 선 유일무이한 존재로 조선의 그림과 글씨가 향토성에 머물지 않고 폭넓은 국제적 지평에서 이뤄질 수 있도록 한 단계 끌어올린 공로자다.북경의 학문과 예술을 경험한 후 금석학과 고증학, 고전적 글씨체의 연구에 전념했던 김정희는 북경 학계의 동향을 국내에 단순히 소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러한 학문적, 예술적 경향을 조선사회속에 뿌리내리는 토착화 작업을 했다.추사의 스승이자 북학파의 테두인 박제가가 주창한 법고창신(法古創新)에서 더 나아가 입고출신(入古出新)을 주창한 추사 김정희는 중국고전에 바탕을 두고 독자적인 서법의 경지에 이르렀다.추사 김정희와 동시대를 살았던 박규수는 추사의 서법에 대해 “어렸을때는 오직 동기창(童基昌)에 뜻을 두었고 중세(中歲)는 옹방강을 열심히 본받았다. 그리고 나서 소동파와 미불과…구양순(歐陽詢)을 따랐다. 그러나 만년에(제주도 귀향살이로)바다를 건너갔다 돌아온 다음부터는 (남에게)구속되고 본뜨는 경향이 다시는 없게 되었다. 여러 대가의 장점을 모아서 스스로 일법(一法)을 이루게 되니 신(神)이 오는 듯 기(氣)가 오는 듯하며 바다의 조수가 밀려 오는 듯하였다”라고 평했으며 이를 통해서도 추사 김정희의 독자적인 서법의 세계를 알 수 있다.또한 그림과 글씨에 있어 개성적인 신문인화풍의 리더였던 추사 김정희는 중국의 역대 그림과 글씨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던 당대의 감식가(鑑識家)였고 탁월한 미술평론가였다.19세기 예술계에 있어 새바람을 일으킨 추사 김정희는 이 경향을 기존의 양반 문인들, 중인계급의 신 지식인, 승려들에게까지 전파했다.▲추사의 제주 유배 한글 편지 고찰<윤치부 제주대 교수>완당전집에 수록되진 않았으나 지금까지 학계에 발굴 소개된 언간이라는 34편의 한글편지는 추사 김정희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중요한 자료이다.특히 제주 유배생활기간중 아내와 며느리에게 쓴 15편의 한글편지는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한다.8년여에 이르는 세월동안 유형자의 삶을 살아야 했던 추사 김정희는 폐쇄된 자기공간과 외부세계를 연결하는 매개체로 편지를 활용했다.이러한 편지글은 추사 김정희가 일상적인 문제들에 대해 어떠한 문제의식을 가졌는지를 가늠해 볼 수 있게 한다.유배생활동안 병으로 고생한다는 상황, 살아있는 것 같지 않다는 등의 유배인으로서 고통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묘사한 대목도 있다.이외에도 제주도민들이 산나물을 잘 먹지 않는다. 김치가 없다는 등의 민속적상황도 기술돼 당시 제주도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추사가 한문편지 외에 34통의 한글편지를 남겼다는 것은 그 자체가 추사가 실사구시 정신의 실천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이다.당시 양반 사대부로서 한글을 실생활에 쓰는 경우가 많지 않았음에도 추사를 비롯 추사의 집안에서 한글편지를 쓰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었다는 점도 알수 있다.이런 점에서 추사체라 일컬을때 한문서체에만 한정이 되는 점이 있는데 한글서체에까지 그 연구를 확장시켜야 할 것이다.짧지 않은 8년여에 이르는 유배생활동안 추사 김정희는 편지를 통해 심리적 갈등이나 기본적 욕구들을 표출하고 있다는 점에서 완당전집에 수록된 그 어떤 자료보다도 중요한 가치를 지닐뿐 아니라 추사를 이해하는데 소중한 자료가 된다.또한 제주에서 부인과 며느리에게 보낸 15편의 한글편지는 제주에서의 유배생활을 이해하는 단초를 제공함은 물론 추사의 유배 문학의 의미를 고찰하는데 기본이 된다.또한 이 한글편지들은 당대의 양반 사대부로서 한글을 몸소 실천했다는 점을 보여주며 이는 김정희의 실사구시 정신 자세와 일맥 상통하는 점이라 하겠다. ▲추사 김정희의 예술론과 회화세계<이태호 전남대 박물관장>추사 김정희의 미적기준과 취향은 시대에 역행하는 보수적이고, 사대주의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으나 이러한 한계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화 창작론에서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예술의 경지에 도달했다.실사구시적 학문 태도와 다름없이 생생한 창작 체험을 토대로 예술론을 펼친 것이다. 그렇기에 그만의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할 수 있었다.김정희는 예술미 돋보이는 그림같은 서체를 창안하여 한국서예사에 부동의 위치를 점유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청조 문예계에 뒤지지 않는 독보적인 평가를 받았다.동시기에 청조 문인들의 서예작품을 살펴보더라도 추사체보다 나은 개성적 서체나 예술성을 찾아보기 힘들다.추사 김정희는 청조의 예술가들을 뛰어넘는 자신만의 학문과 예술을 통해 국제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그러나 당시의 사회가 봉건사회 해체기였던 만큼 그 시대적 한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그의 서화나 예술론에는 김정희 개인의 탁월한 예술적 감수성이 돋보이나 ‘조선적인’, ‘시대의 향기’를 풍기지 않는 것도 이때문이다.▲동파의 해남도와 추사의 제주도 유배문학을 중심으로<조규백 산업정보대 교수> 동파와 추사는 비록 나라가 다르고 시대가 다르지만 모두 유사한 체제의 왕조시대에 살았고, 각기 독특한 개성을 발휘하면서도 닮은 인생길을 걸어간점 등 비슷한 점을 내포하고 있다.동파의 경우 중원회귀의 의지와 제 2의 고향 감정이 강약의 변화를 보이며 교차하는 이중주의 모순을 보이고 있다.시간의 추이에 따라 상대적으로 제2의 고향 감정이 더 농후하게 나타난다.동파는 도연명의 인생과 문학을 스승으로 삼아 화도시(和陶詩)를 완성하고 그의 인생행로를 추앙하며 살았으나 자신의 개성적인 형상을 잘 반영하고 있다.또한 일상생활의 소소한 정취를 통해 고독과 고통을 녹이고 유유자적하게 삶의 정취를 만끽하는 여유가 나타난다.추사의 경우는 정치중심지로 회귀하려는 마음이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것과 동시에 유배지에서 인연에 따라 살려고 하는 적응의지도 나타난다.추사는 동파의 생애가 자기와 유사점이 있다고 인식, 동파와 유사한 경지를 만나면 시구를 인용, 변용하는 등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지간에 동파와 같아지려고 노력했고 닮아갔다.유배지에서 추사가 그만의 독특한 추사체를 완성한 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정진을 위한 ‘위기지학(爲己之學)’을 했기 때문이다.동파는 낙천적인 기질이 강한 반면 추사는 어둡고 고통의 이미지가 상대적으로 강하게 나타나며 유배지에서 고통에 허덕이면서도 주위를 응시하고 학문과 예술에 정진하고 있다.특히 동파의 경우 유유자적하게 인생을 즐기는 풍이 두드러지나 추사인 경우 유배라는 테두리에 얽매이는 경우가 많았으나 이를 독창적인 예술정신으로 승화시킨 점이 돋보인다.이렇듯 동파와 추사는 유배지에서도 고뇌를 통해 자아를 발견하고 초탈하고자 했으며 이를 예술로 승화시켰다. 제238호(2000년 11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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