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팡]‘땅은 지난 여름 네가 한

올해 농사를 지어보니 지난 해 힘들었던 것은 힘든 게 아니었다. 지난 해야 돈이 되는 농사는 거의 짓지 않았을 뿐더러 집을 고치고 이것저것 영농에 필요한 기구나 기계를 사들이는 것이 고작인, 오히려 놀고 먹으며 돈을 쓰고 앉아있었던 것에 불과했다. 그러다 올해 막상 고구마 농사를 짓고 비닐 하우스를 설치하여 고추를 심고 거기에 다섯 사람이 동아리로 닭장까지 만들어 양계를 시작했으니 우리 같은 초짜 농꾼은 정신을 차리기 어려웠다. 남편과 내가 번갈아가며 몸살을 앓고 마음고생을 하긴 했지만 시간은 잘도 흘러갔고 이젠 수확을 해야 할 시간. 약 2만평에 심은 전분용 고구마의 수확량은 3만관이 못 미치는 양. 올해는 너도나도 고구마를 심어선지 수매가 쉽지 않아 며칠을 기다려 우여곡절 끝에 1관당 8백50원에 팔아치우고 나니 한숨이 절로 나왔다. 그간 개인당 5백만원이 넘는 투자비용을 제하고 남은 수입을 세명이 나누어 보면 4월부터 11월까지 한달 월급으로 환산하여 50만원도 채 안되는 돈이다. 그래도 밑지지 않은 것만으로도 농사 잘 지었다고 사람들이 위로를 하니 그러려니 해야지 별 도리가 없다. 하기야 작년 첫해 농사지은 귤을 팔지 못해 안달을 하다가 관당 5백원에 팔아야 했던 것에 비한다면 얼마나 다행이랴 싶기도 했다.쓴 맛을 남긴 고구마 농사와는 달리 올해 귤농사는 우리에게 큰 보람과 긍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철저하게 무농약 원칙을 고수했던 우리는 지난 달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에 무농약 친환경농산물 표시사용 신고필증 교부 절차를 받았다. 결과는 OK였다. 게다가 정말 다행스럽게 판로도 확보되었다. EM생활환경회와 손을 잡고 있는 서울의 시민단체와 직거래하기로 된 것이다. 상인과 1대1의, 턱없이 불리하고 불합리한 관계 속에서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팔아넘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무엇보다도 안도했고 우리가 기울인 노력과 정성을 인정받은 것 같아 즐거웠다. 사실 지난 해의 수모를 당하지 않기 위해 올해 남편은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농사를 지었던가. 품질관리원에 제출할 서류를 작성하면서 따져보니 올해 남편이 음식액비, 청초액비, 생선액비, 어즙, 보카시 등의 유기질 비료와 기피제를 뿌린 횟수는 20회가 훨씬 넘었다. 2주전 측정한 우리 귤의 당도는 11.5브릭스. 놀랄 만한 성과였다. 관행농법에서 사용하는 농약을 전혀 하지 않아 어떤 모습으로 나올 지 걱정이 컸는데 외양도 그다지 흉하지 않다. 껍질을 까서 깨어물면 입안 가득 고이는 상큼한 신맛과 달콤함, 다 먹고 난 뒤에도 오래도록 입안에 여운을 남기는 살아있는 맛은 다름아닌 내 남편의 피땀일 게다.올해 자신감을 얻은 남편은 내년부터 귤발 8천평을 임대하기로 했다. 역시 제초제나 농약을 쓰지 않고 영양분을 충분히 먹이는 농법을 시도할 것이다. 열심히 먹이고 보살펴준다면 땅은 반드시 우리에게 대가를 돌려줄 것이라고 나는 믿어 의심치 않는다. 땅이야말로 ‘지난 여름 네가 한 일을 알고 있기’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땅의 정직성을 확신한다. 얼마를 들여 농사를 지었더니 얼마를 벌게 해주었다는 그런 산술적인 계산 말고 땅을 살리기 위해 어떻게 노력과 정성을 기울였더니 어떻게 얼마만큼 살아나는가를 몸소 열매로써 보여주는 그런 정직성 말이다. 우리 귤밭만 하더라도 15년 이상된 성목들인데 그동안 내내 화학비료와 농약에 찌들어있다가 2년 가까이 기울인 정성 덕분에 이제서야 기를 펴기 시작하고 있다. 화장한 여자들의 얼굴은 겉보기에는 예쁘다. 하지만 화장을지운 뒤의 얼굴이야말로 진짜 얼굴이 아닐까. 화장독에 찌든 얼굴에서 건강미나 신선미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땅이나 나무도 이와 비슷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살아있는 그 자체가 아름다움인 그런 건강미를 나는 우리의 땅과 나무에게서 발견하고 싶다.조선희/남군 표선면 토산리 제240호(2000년 12월 1일)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