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수첩]이 겨울 나의 소망은

몇년 전 친구랑 둘이서 논고 오름을 오르다 잠시 멈추어서 신선한 기에 마음껏 취해 본적이 있다. 마치 우리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반가이 웃어주던 들꽃들 그리고 맑은 공기가 기분 좋게 발목을 붙들었다. 자연과 하나 되어 나를 되돌아보는 즐거움을 맛보았다. 살아있다는 자각과 함께 행복을 느끼게 하는 순간이 지속되면서 친구와 나는 오랜만에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가식 없이 나누었다. 산수국, 쑥부쟁이, 패랭이 그리고 이름 모를 들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이야기를 풀어헤치다 보니 자연과 인간과 사회가 그냥 하나라는 느낌이 왔다. 아둥바둥 살아가던 하루하루가 우습게도 느껴지기도 하고 놓쳐버린 시간들이 소중하게 다시 다가오기도 하였다. 그때 논고 오름의 가을은 여유가 있었다. 작으면 작은 대로, 크면 큰 대로,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빛으로 가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욕심을 부리려고 하지도 않고, 보잘 것 없다고 부끄러워하지도 않았다. 자신의 색깔을 더한층 진하게 내보이며 서로 어울려 가을을 연출하고 있었다. 새 천년의 가을이 다 가고 겨울의 문턱을 넘어선 지금 갑자기 논고 오름의 가을이 생각나는 건 바로 그 ‘여유’ 때문이다. 일요일이면 아이들 손을 잡고 역사 기행을 다니던 때가 엊그제 같다. 코스모스 한들거리는 꽃길을 찾아가 꽃관 만들어 쓰던 풍경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오름들이 오누이처럼 소곤대는 길녘에 차를 세우고 황금빛 석양에 억새꽃이 물드는 장엄한 광경에 감탄을 하던 게 엊그제 같다. 그때도 아주 바빴었다. 늘 할 일이 있었다. 그러나 여유가 있었다. 그 여유는 나에게 삶을 되돌아보게 하였고 살아가는 의미를 느끼게 하였다. 그 여유를 만끽하며 나는 세상을 넓고 깊게 사랑하는 방법을 깨닫곤 하였다. 요즘은 점점 여유가 없어지고 있다. 사회 곳곳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있다. 교사들이 여유를 잃으니 아이들도 마음에도 여유가 없다. 늘 바쁘다. 자신을 돌아볼 여유가 없다. 상대방을 헤아릴 여유는 더더군다나 없다. 양보와 이해를 이야기 하기엔 너무도 멀리 아이들이 가 있음을 느끼곤 한다. 여유를 잃어가니 모든 것들이 제자리를 잃는다. 가르친다는 것은 아이들의 변화를 전제로 이루어져야 가치가 있다. 물론 지식으로 인한 변화는 당장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자신의 삶에 자신감을 갖고 즐겁게 살아가는 변화, 열심히 무엇인가 해 보려는 변화, 친구들과 어울리는 참 기쁨을 느껴가는 변화 등등이 초등학교 어린이들에게는 꼭 필요한 변화이다. 이러한 변화를 몰고 올 수 있는 사람은 담임교사이다. 그러나 요즘 초등학교의 담임교사들이 해야 할 일이 왜 이리 많은지 모르겠다. 어린이들과 머리를 맞대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없다. 수업시간에도 자료, 과정 평가, 조사과제 점검 등등이 동시에 이루어지려면 아이들 하나하나의 눈망울에 시선을 맞출 여유를 잃고 만다. 그래서 수업이 끝나도 시원하지 않다. 아이들 가슴 속에 무엇을 심어 주었는지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초등의 경우 수업 준비도 장난이 아니다. 자료를 찾는 것도, 그 자료를 정리하는 것도, 그 자료를 연구하는 것도 보통 시간이 소요되는게 아니다. 매일 그 많은 과목 교재 연구를 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고학년의 경우는 교재연구를 할 시간도 없다. 어떤 경우에는 가정의 일도, 휴일도 반납하며 기를 써도 바쁜 일상은 수그러들 줄을 모른다. 신자유주의의 물결이 교육계에 몰아치면서 학교는 더욱 더 여유를 잃어가고 있다. 7차교육과정이 적용되는 1, 2학년 선생님들은 더 힘들다고 한다. 수준별 교육과정을 적용시킨다는게 현실적으로 교사에게 너무 버거운 짐을 지운다고 한숨을 쉰다. 선생님들이 지쳐가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미래를 짊어질 우리 아이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인성교육이라고 누구나가 말한다. 인성교육을 시킬 교사들은 여유로운 가슴을 지녀야 한다. ‘훈훈한 마음으로 빙그레 웃는 얼굴’을 말씀하신 도산 안창호 선생님께서 그 어렵고 힘든 시기에 왜 그런 말씀으로 백성들에게 다가가셨는지 새롭게 와 닿는다. 교실에서 고민하고 있는 교사들의 이야기가 진솔되게 정책에 반영이 되고 웃음과 사랑이 넘치는 학교를 위해 사심없이 실천하는 훈훈한 분위기는 여유있는 교사들에 의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교사를 정신없이 경쟁의 도가니로 몰고가지 말았으면 하는게 이 겨울을 맞는 나의 간절한 소망이다. 아이들 역시 경쟁의 도가니, 우열의 선택 주사위 속으로 너무 몰고 가지 말았으면 하는게 나의 작은 소망이다. 박희순/제주교대부속교 교사 제241호(2000년 12월 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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