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2>

나는 1943년 안덕면의 중산간 마을 상천리에서 태어났다. 집안어른들 얘기로는 그런대로 괜찮게 사는 집안에서 호강하며 자랐다는데, 안타깝게도 내게 유년시절의 기억은 없다.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어린 시절에 대한 첫 기억은 총소리다. 그리고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었던 길과 그 끝에 다다른 바다, 그 바다하고 딱 붙은 마을의 한 마굿간이 뒤를 잇는다. 나중에 알고 보니, 내가 여섯 살 되던 해 일어났던 4.3의 총소리였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피난하던 길이었으며, 한림읍 귀덕리 바닷가 한 친지의 집에 있던 마굿간이었다.

▲ 앞줄 좌측 첫번재 의자에 앉은 분이 주판을 구해준 아버지(김봉오), 끝부분은 필자(김계담)의 어린시절. 1956년 사촌형 결혼 사진.

4.3 당시 다른 마을로 소개되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듯이 우리 부모님도 당장에 덮고 입을 이부자리와 옷 몇 벌만 챙겨들고 정든 집을 떠났었다. 혼란으로 경황이 없기도 했겠지만 금방 보금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낯선 마을에서의 남의 집 더부살이는 나의 초등학생시절 내내 이어졌다.

그 시절 나는 밥을 먹어보는 게 소원이었다. 우리 집 밥상에는 늘 죽이 올라왔기 때문이다. 콩이나 보리 같은 알갱이가 섞인 죽은 매우 드물었다. 보릿겨에 조, 감자, 고구마, 지금도 이름을 알 길 없는 나물 따위가 짓물러진 채 섞여있어 색깔조차 별스럽던 죽을 거의 날마다 먹어야 했다. 맛은 고사하고, 가뜩이나 양이 적은 데다 소화도 금방 돼버리는 바람에 늘 배가 고팠다. 그것마저 실컷 먹어보지 못했지만 그때 어찌나 질려버렸는지 나는 지금도 죽을 먹지 않는다.

또 하나 잊어버릴 수 없는 것은 학교에서 돌아오기만 하면 주인집 아기를 업어야 했던 일이다. 애기업개 노릇을 했던 것이다. 애기가 애기를 업었다는 소리를 들은 걸 보면 그때 나도 어지간히 작은 아이였던 모양이다.

밥을 먹어보는 게 소원일 만큼 늘 배가 고팠고, 애기업개를 하느라 마을아이들과 마음대로 뛰어놀아보지 못했으니, 밝고 활발할 리가 없다. 어린마음에도 가난한 집안형편이 원망스러웠고, 아버지 어머니가 야속하게 느껴졌다. 세상에 희망이라는 단어가 존재하는 줄도 모르는 채 원망부터 배우며 자라고 있었던 것이다.

▲ 제주교육박물관에 기증한 주판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기를 펼 수 없으니 조용히 지냈고, 공부에도 흥미를 느끼지 못해 학교생활이 즐겁지 않았다.

그러다 5학년 된 어느 날, 미술시간에 태극기를 그렸는데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 내가 그린 그림이 교실에 붙여졌다. 부러워하는 아이들의 시선이 흐뭇했다. 인정받는다는 것, 주목받는다는 것에 대한 매력을 그때 처음 느꼈다.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칭찬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것이다. 

공부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어느 날, 교과서에서 주산을 배우게 되었다. 소질이 있었는지, 운명이 되려고 했었던 것인지, 주산시간은 유난히 나를 집중케 했다. 선생님의 칭찬도 이어졌다.

주산을 제대로 익히려면 주판이 있어야 했다. 우리 집 형편으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는데, 아버지가 일본제 주판을 구해다 주셔서 나를 놀라게 했다. 늘 풀죽어 지내던 아들이 주산에 흥미를 느끼며 기를 펴기 시작했다는 걸 알고, 멍석 한 채와 망태기 두 개를 손수 짜서 그 주판과 바꿔 온 것이다. 그것이 내 생애 첫 주판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이 담긴 그 주판은 1993년 제주도교육박물관에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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