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3>

▲ 현재 솔동산로 세탁소 자리가 1960년대에 중국음식점이 있었던 위치, 지금은 도로가 넓게 포장돼 옛 모습이 사라져버렸다.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처음 만난 주산은 아버지가 멍석을 손수 삼아 맞바꿔다 준 주판과 더불어 새로운 세상을 만나게 해주었다. 배우고 깨달았을 때 오는 희열과 몰입한 뒤 느끼는 성취감을 그때 처음 맛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주산과의 만남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꿀만큼 우리 집안은 여전히 가난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밥 먹는 입을 하나라도 줄이기에 급급할 만큼 대부분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다. 우리 집 역시 그런 이유로 어머니가 나를 제주시에 사는 어느 친척에게 보내기로 했다.

나의 고향 안덕면 상천리에서 제주시까지 가려면 한라산을 넘어야 했다. 당시는 웬만하면 다 걸어 다녔고, 먼 길에는 전문적인 길잡이가 있었다. 행선지가 같은 사람들끼리 미리 약속해서 날을 정해놓고 길잡이의 안내로 길을 떠나곤 했던 것이다.

제주시로 가기 위해 집을 나섰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난생 처음 가게 된 제주시에 대한 호기심, 가족과 떨어져 혼자 지내야한다는 두려움, 그것이 가난 때문이라는 서러움 등이 한데 얽혀, 어렸지만 심사가 참 복잡했었다. 미래가 참 암담하게 느껴져, 제주시로 가는 길을 안내하는 길잡이처럼 미래의 길 또한 누군가 안내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어쨌든 종아리가 뻣뻣해지고 발이 부르트도록 걷고 또 걸어서 도착한 곳은 지금의 제주시 동문로터리 근방에 있는 작은 빵집이었다.

빵집에서 먹고 자는 대신 청소와 잔심부름을 하며 지냈다. 배고픔은 면했는데, 잠자는 시간이 너무 모자랐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는 잡일을 해야 했고, 밤중에는 밀가루반죽을 시간 맞춰 조치해야 했기 때문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던 것이다. 결국 힘에 부쳐 견디지 못하고 한 해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친척분의 소개로 서귀포시내에 있는 중국음식점에 취직을 했다. 말이 취직이지, 용돈 정도 받기로 하고 주방의 잡일을 하는 것이었다. 이 중국음식점에서 나의 미래를 진지하게 생각해보는 계기를 만나게 된다.

어느 날 손님들이 들어왔는데, 이상하게 내 눈에 확 박히더니 가슴이 두근거렸다. 일행 모두가 단정하고 말쑥한 옷차림이었는데,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다. 분위기가 남다르게 느껴졌던 것이다. 어느 학교의 선생님들이라고 했다. 

선생님하고 입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가슴이 뛰었다. 그때까지 난 무엇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었다. 그날 처음으로 선생님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다. 그러나 이내 절망했다. 선생님이 되려면 학교에 다녀야 하는데, 그럴 수 없는 내 처지를 깨달은 것이다.

절망은 갈망으로 변했다. 학교에 다니고 싶었다. 미치도록 공부하고 싶었다. 간절히 원하면 길이 열리는 법이다. 그 중국음식점의 종업원 가운데, 나보다 서너 살 위여서 형이라 부르며 따르던 사람이 있었다. 그를 통해, 학교에 다니지 않고도 당시 강의록이라 불렀던 책으로 공부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가 공부하는 강의록을 빌려다보기도 하고, 쥐꼬리만 한 봉급이지만 아껴 모아 직접 사다보기도 하면서 일하는 틈틈이 공부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학으로 중학교 과정을 마쳤다.

이때 느꼈던 처지에 대한 비관과 공부에 대한 갈증은 훗날 그 어떤 일보다 적극적으로 나섰던 무료봉사교육의 직접적인 발판으로 작용했다. 특히 가난한 집안형편 때문에 공부할 시기를 놓친 청소년들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려 애썼던 것도 바로 이때의 경험과 기억 때문이었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