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4>

▲ 현재 솔동산로 동부새마을금고 남쪽 두번째 위치(서귀동 626번지)에 학원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도로가 넓게 포장돼 옛 모습이 사라져 버렸다.

내가 생각해도 나는 욕심이 별로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딱 한 가지, 공부에 대한 욕심은 누구 못지않게 강했다. 독학으로 중학교 과정을 나니, 고등학교에 진학해 공부하고 싶은 욕심으로 속이 탔다. 그러나 중국음식점에서 받는 쥐꼬리만 한 봉급으로도, 여전히 어려운 우리 집 형편으로도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즈음 아버지가 많이 아프셔서 고향집으로 갔다. 그리고 내 생애 가장 잊지 못할 시련과 만나게 된다. 

아버지는 내가 열여섯 살 되던 해 보릿고개 때 세상을 떠나셨다. 당시는 거의 해마다 보릿고개를 겪곤 했던 시절이었는데, 그해의 보릿고개는 유난히 혹독했다. 아버지를 잃은 슬픔만으로도 너무나 버거운데, 먹거리를 구하러 다니느라 몸도 마음도 천근만근 지칠 대로 지쳐갔다.

화순에 있는 전분공장에 가서 고구마 전분을 걸러낸 찌꺼기를 얻어 구덕에 지어오곤 했는데, 많이 가져오지도 못했다. 물기를 잔뜩 머금고 있어 무거웠기 때문이다. 물이 질질 흐르는 그것을 가져다가 돌에 붙여 물기를 빼고 죽을 쑤어 먹었다.

산에 올라가 나무뿌리를 캐다 먹기도 하고, 들에서 물옷을 주어다 먹기도 했는데 목구멍이 와작와작 탈 정도로 맵고 따가워서 눈물이 저절로 찔끔거렸다. 보릿고개를 겪어본 내 또래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그때는 그렇게 별 걸 다 먹었었다.

한 번은 산에 올라가 먹을 만한 나무뿌리를 찾다가 다른 사람이 이미 파헤쳐놓은 흙구덩이를 보고 앉아서 엉엉 울었다. 먹을 걸 찾아 헤매는 나도 불쌍하고, 나보다 먼저 나무뿌리를 캐간 그 누군가도 불쌍하고, 그렇게 살아야하는 사람들 모두가 불쌍해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만큼 힘든 상황이기도 했지만, 그 시절 나는 일생 중 가장 민감한 시기인 사춘기여서 더 그랬던 것 같다. 

그 보릿고개 때 나는 산다는 게 참 지겨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힘든 삶을 내가 왜 견디고 있는지,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살 필요가 없으면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러기로 결심했다.

죽기로 마음먹고 죽을 방법을 찾으려니 그것도 어려웠다. 이 방법 저 방법 궁리하다가 목을 매기로 결정하고 밧줄까지는 찾아들었는데, 이번엔 장소가 문제였다. 여기저기 물색하다가 서까래로 결정하고 비장한 마음으로 그 아래로 가 섰다. 막상 밧줄을 들고 서까래를 올려다보니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저 세상 가서 아버지를 만나면 뭐라고 하실까. 어머니가 죽은 나를 발견하면 얼마나 놀라실까. 물론 핑계였다. 사실은 두려웠다. 나는 죽을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밧줄을 든 채 서까래 아래를 왔다갔다하다가 결국 포기했는데, 그 다음은 또 죽을 용기도 없는 비겁한 자신을 책망하느라 힘들어 해야 했다.

열여섯 살 때 겪었던 이 사연이 내 인생에서 가장 잊지 못할 시련인 셈이다. 지금 생각하면 픽픽 웃음이 나지만, 그때는 정말 심각했었다. 

얼마 뒤, 죽지 않기를 잘했다고, 죽을 용기가 없다는 것이 결코 비겁한 게 아니라고 생각할 기회가 찾아왔다. 어느 친척분의 소개로 서귀포 솔동산 아래 부두 부근에 있는 주점에서 일하며 고등학교를 다닐 수 있게 된 것이다.

학교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서둘러 주점으로 달려가서 밤늦게까지 일하는 생활에 익숙해진 고등학교 2학년 무렵, 주점과 가까운 곳에 제주주산학원 서귀분원이 생겼다.

솔동산 목조건물 2층에 있는 그 주산학원의 간판을 발견하던 날, 가슴이 몹시 두근거렸던 기억이 새롭다. 용돈을 모아 틈을 내서 주산학원을 찾아갔다. 그리고 초등학교 5학년 때 만났다 헤어진 주산의 세계,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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