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5>

▲ 학창시절 오용구 형님, 친구 김문길, 오덕훈씨와 함께(필자 김계담은 사진의 오른쪽)
처음 '제주주산학원 서귀분원'의 문을 열 때의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설렘에 긴장이 보태져 얼핏 현기증이 일었던 것도 같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30평 남짓한 면적에 앉은뱅이책상이 두 줄로 길게 놓여있던 학원 안의 분위기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떠오른다. 30명쯤 앉으면 꽉 차던 그 학원에서 나는 다시 주판을 잡았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이후 6년 만의 일이었지만 주판 위에서 만나는 숫자의 세계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그 속으로 빠르게 빠져들어 갔다.  

주산에 몰입하노라면 배고픔도 잊어버리고, 나를 의기

▲ 내동생 김계향과 함께
소침하게 만들던 가난의 고통도 잊어버렸다. 연습하고 또 연습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숙달되는 재미와 기쁨을 맛보았다.

당시 서귀분원장은 강웅정 씨, 나이가 나보다 육칠 세쯤 위였는데 열심히 연습하는 내가 기특했는지 자상하게 잘 가르쳐주고 형처럼 잘 대해주었다. 분원장의 주산 친구인 오용구 씨가 학원에 자주 놀러오곤 했는데, 그 역시 나를 동생처럼 잘 대해주었다. 내게 주산에 소질이 있다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던 그 두 분이 있어 더욱 열심히 연습했던 듯하다.

그러던 어느 날, 오용구 씨가 전학수속은 책임지고 맡아줄 테니 제주시에 있는 제주상고로 전학해서 소질을 키워보라고 했다. 

당시 주산은 급수자격증만 따면 좋은 직장이 바로 연결되는 전망 밝은 인기 기능이었다. 4급 이하는 도청 소재지에서 시험을 치를 수 있지만 3급 이상은 육지로 나가 검정시험을 치러야할 만큼 급수자격증 따기도 쉽지 않을 때였다. 더불어 일반인들 중 급수자격증 소지자는 손가락을 꼽을 정도로 귀한 시절이기도 하다.

주산에 소질이 있다고도 하고, 무엇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어서 그때 마음으로는 제주상고로 전학만 하면 급수자격증 따는 건 문제도 아닐 것만 같았다. 문제는 당시 소 한 마리 값에 맘먹는 전학비용이었다. 고학을 하는 내 처지로도, 고향집의 어려운 형편으로도 어림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포기하기에는 공부하고 싶은 갈망이 너무나 강했다. 기댈 데라고는 고향집밖에 없었지만, 농사짓느라 고생만 하는 어머니와 동생의 사정을 잘 알고 있었기에 참으로 속이 상했다. 몇날며칠 고민하고 갈등하다가 의논이라도 해보자 싶어 착잡한 마음으로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고향집으로 갔다.

고향집에서도 한참을 망설이다가 어머니와 동생에게 조심스럽게 사정 이야기를 꺼냈다. 열심히 공부해서 상고졸업장을 꼭 바치겠노라, 주산으로 반드시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키겠노라는 약속과 함께….

솔직히 기대하지 않았는데, 어머니와 동생이 선뜻 내놓는 의견에 깜짝 놀랐다. 기둥처럼 의지하고 아끼던 집안 재산목록 1호인 소를 팔아 전학비용을 마련해주겠다는 것이 아닌가?

그때 나눈 이야기의 내용이 다 생각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은 분명하게 기억난다.

"소를 팔아 줄 테니, 하고 싶은 공부를 해라. 열심히 공부해서 약속을 지켜야 한다."
"형님을 믿습니다. 우리의 기대를 잊지 마십시오."

그때의 고마움과 미안함을 어떤 말로 대신할 수 있으랴. 어머니와 동생의 무조건적인 믿음과 사랑으로 그동안 혼자 객지에 나가 힘들고 외롭게 지내며 쌓였던 아픔이 한꺼번에 눈 녹듯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새로운 힘이 솟는 걸 느꼈다. 

그렇게 해서 1962년 제주상고 야간반으로 전학을 했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