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7>

1963년 2월 18일은 '제주주산학원 서귀분원 강사'라는 이름으로 내 새로운 인생이 시작된 날이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당당한 사회인이자, 그렇게 꿈꿔왔던 교육자로서의 첫 날, 그 첫 강의 시간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그때 나는 변변한 옷 한 벌이 없어서 교복을 입었고, 짧은 상고머리가 채 길기도 전인 앳된 얼굴이었다. 그래도 선생님이라고 학원생들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내 눈과 입을 주시하고 있었다.

10여 명의 중고등학생들과 30여 명의 초등학생들이, 당시 내가 주산강사로서 처음 맡은 학원생들이었다. 중고등학생들 가운데는 불과 2년 전에 주산을 함께 배운 학생들도 있었다.

▲ 제주주산학원 서귀분원 제2기 수료식(1963. 2. 28) 기념사진 중앙에 앉은 분이 정동규 분원장이며 뒤줄 오른쪽 끝부분이 필자(김계담)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소리에 떨리고 긴장되던 몇 개월은 그야말로 어떻게 지나갔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당시 서귀분원은 송대은 제주주산학원장과 친분이 있는 정동규 씨가 맡아 돌봐주고 있었다. 교회 장로이기도 한 정동규 씨는 지금의 천주교 서귀포성당 옆 자리에 있었던 오석당 약방을 운영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곳에서 숙소가 정해질 때까지 기거를 하며 신세를 졌다.

정동규 씨는 60고개의 초로였지만 그 어떤 젊은이보다 활력이 넘치는 건강한 지성인이었다. 그는 내게 많은 얘기를 들려주었다. 특히 봉사정신에 대해 강조했는데, 그저 교훈으로 그치는 게 아니었다. 청렴한 생활태도와 적극적인 봉사활동으로 주위의 존경을 받고 있었다.

정동규 씨로 인해 나는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었다. 직업도 중요하지만,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 깨달음 덕분에 내 인생에도 자연스럽게 봉사활동이 시작되었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느니, 정동규 씨는 내게 영원한 멘토이자 스승인 셈이다.

학원생들이 나를 향해 부르던 '선생님'이라는 소리에 가슴 벅차하면서도, 조심스러운 마음과 어깨를 누르는 무거운 책임감이 부담스러워, 시간이 날 때마다 나 자신의 실력을 쌓기 위해 부지런히 주산연습을 했다.  

당시 서귀포에는 학원이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내가 강사로 있는 주산학원서귀분원이었고, 또 하나는 여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편물학원이었다.

경리 등의 직업인으로 취직하기 위해서, 상고로 진학하기 위해서 그리고 상고에 다니는 학생들만 배우는 특별한 기능쯤으로 주산이 인식되던 시절이어서, 서귀분원 학원생 수는 좀처럼 늘지 않았다.

학원 강사 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질 무렵, 분원에서 본원으로 인가를 받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다. 본원으로 독립해 본격적으로 주산교육 보급을 하고 싶어서였다. 정동규, 송대은 씨와 함께 새로 인가받을 학원의 이름을 의논했다. 여러 이름이 거론되었는데, '계명'으로 결정되었다.

계명(啓明) - 주산교육 자체도 밝게 열릴 것을 기대했지만, 주산교육이 사회에 열리고 널리 퍼져서 사회를 밝게 하기를 바라는 큰 뜻을 담은 이름이었다. 뜻은 다르지만 음이 같은 내 이름자가 하나 들어있어서 더욱 마음에 들었다.

인가에 필요한 서류며 절차는 송대은 씨가 모두 맡아서 뛰어다녔고, 원장은 정동규 씨가 맡았다. 학원 장소는 지금의 솔동산로 동부새마을금고 남쪽 두 번째에 위치한 서귀동 626번지로 제주주산학원 서귀분원 그 자리다. 

그렇게 해서 1964년 2월, 새로운 간판을 단 '계명주산학원'이 태어났다. 서귀포에는 처음 생긴 독립된 주산학원이었고, 내게는 학원생들을 가르치는 것은 물론 운영 전체를 책임지게 된 새로운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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