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8>

계명주산학원이 문을 연 1964년 당시 서귀포에서의 주산교육은 학원으로 찾아오는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게 전부였다.

주산은 계산 매체로서의 기능도 중요하지만, 실생활에 매우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자라나는 청소년들의 두뇌개발은 물론 집중력, 창의력, 판단력, 이해력, 응용력 등을 기르는데 큰 도움을 준다. 그렇게 중요하고 탁월한 효과가 있는 주산교육을 학원에 찾아오는 학생들만 대상으로 한다는 게 안타까웠다.

▲ 스승의 날에 꽃을 달고 기념촬영, 왼쪽부터 홍순방, 부태익, 김백련, 선생 님이시고 끝부분이 필자(김계담)

주산을 좀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인식시키고, 많은 학생들에게 주산교육을 보급시킬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다가 정동규 원장과 의논했다. 정 원장은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순수하게 봉사할 생각이 있으면 방법이 있다고 했다. 나는 그에게 이미 봉사정신의 참된 의미를 숱하게 들어왔고, 새롭게 태어난 마음으로 생활하려 애쓰던 터라 어떤 식의 봉사라도 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나의 마음과 각오를 재차 확인한 정 원장은 당시 학원 가까이에 있는 서귀여자중고등학교 교장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당시 교장은 강종숙 선생님이었는데, 정 원장과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 

주산교육에 대한 얘기를 들은 강 교장은 특히 여학생들에게 필요한 좋은 교육이라고 생각하지만 예산이 다 짜인 뒤라 줄 보수가 없어 안 되겠다고 했다. 나는 어차피 무료봉사를 생각하고 있었다며 학생들에게 주산교육을 시키도록 허락만 해달라고 했다. 그런데 문제가 또 있다고 했다.

▲ 서귀여중생들과의 소풍기념, 뒤쪽에 있는 분이 정금택 선생님이시고, 한 가운데가 필자(김계담)

“감수성이 예민한 시기의 여학생들인지라, 김계담씨가 너무 어린 총각이어서 곤란합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한지 1년 남짓 지난 뒤였고, 또 정규사범교육을 받은 것도 아니니, 그렇게 생각할 만도 했다. 나는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이번에는 정 원장이 나섰다.

“그 문제는 걱정 마세요. 매우 건실한 청년입니다. 제가 책임지고 보장하겠습니다.”

내 신분을 책임지고 보장하겠노라고 나선 정 원장이 무척 고마웠다. 하지만 순수한 내 마음을 몰라주는 학교의 엄격함에는 살짝 섭섭하기도 했다. 사회는 봉사도 마음대로 하기 어려운 곳이로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해서 1964년 4월부터 특활시간을 활용해 주산교육을 맡기로 했다. 내 생애 첫 무료봉사교육이 시작된 것이다.

학교에서의 주산교육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들었다. 학생 수 자체에도 압도당했지만, 주산을 배우기 위해 스스로 찾아온 학생들이 아니기 때문에 반응도 갖가지였다. 교장선생님 말씀이 자꾸 떠올라, 행동을 조심해야겠다는 압박감에 더 긴장되고 진땀이 났다.

어린 총각선생님을 일부러 골탕 먹이려는 장난꾸러기 여학생들도 더러 있어 당황했던 적도 많았다. 그 시절 큰 힘이 돼주었던 정금택 선생님이 새삼 생각난다. 역시 총각선생님이었던 그는 학생들 앞에서 쩔쩔매지 않고 슬기롭게 대처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등 많은 조언을 해주었다.

주산수업은 중고등학교 전체를 대상으로 한 학급 당 일주일에 한 시간씩 주어졌는데, 학급 수가 많다보니 정규교사들과 마찬가지로 출퇴근을 해야 했고, 퇴근 뒤엔 학원으로 가서 또 주산수업을 해야 했으니 다리가 후들후들 떨릴 만큼 고단한 날이 많았다. 그러나 참 열심히 하루하루를 보냈고, 행복했던 기억이 많은 시절이었다. 주산교육수업시간 자체도 잊을 수 없지만 소풍이며 수학여행, 스승의 날에 학생들이 꽃을 달아주던 기억 등은 특히 잊을 수가 없다. 

2년여 쯤 뒤에 군 입대영장이 나와 서귀여자중고등학교에서의 무료봉사교육은 마무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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