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10>

서귀포시 중앙동에 자리한 오석학교의 전신은 재건학교다. 이 학교는 1967년 4월 사단법인 재건국민운동 중앙회의 승인으로 같은 해 5월 16일 개교됐다. 고응삼 씨가 초대교장이었는데, 나는 개교되던 해부터 자원교사로 지원했다. 1969년 2월, 제1회 졸업생 30명이 배출되었고, 같은 해 3월 정동규 씨가 제2대 교장이 되었다.

학생 수는 해마다 불어났고, 당시 남군 농협회관과 중앙유치원 건물 등을 빌려 교실로 썼다. 저녁 일곱 시부터 열 시 반까지 150여 명의 청소년들이 모여 수업을 받았는데, 학생들이나 자원교사들이나 모두들 참 열심이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정규 교육 시기를 놓쳤지만, 어떻게든 배워보겠다는 의지로 재건학교를 찾아온 청소년들에게서 지난날의 나를 보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유난히 애정이 갔다.

▲ 서귀포재건학교 제3회 졸업기념(1972. 4. 1)사진. 사진 중앙에 안경 쓰신 분이 정동규 교장, 오른쪽이 강운옥 교육장님 다음 네 번째가 필자

내가 맡은 과목은 주산과 국어였는데, 나는 수업 시간 틈틈이 가난으로 고생했던 내 지난날의 이야기를 무슨 무용담처럼 들려주곤 했었다. 낮에 일하느라 지친 얼굴로 꾸벅꾸벅 졸다가도 그 이야기만큼은 귀 기울여 들으며 눈빛을 반짝이던 얼굴들을 잊을 수가 없다.

그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너무나 적어 참 안타까워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것은, 보수는커녕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가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격려했던 자원교사 모두의 마음이기도 했다.

나는 학생들에게 1인1통장 갖기 운동을 펼쳤다. 그들이 겪고 있는 경제적인 어려움이 당장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작게나마 목표를 가지고 일을 했을 때 얻어지는 결과를 체험하게 해주고 싶어서였다.

산에 올라가 고사리를 꺾어다 팔고 바닷가에 나가 해산물을 캐어다 팔기도 하며 학생들은 저마다의 통장에 저금을 하기 시작했다. 난생 처음 자신의 이름으로 통장이라는 것을 가져본 학생들이 대부분이어서 무척이나 신기해했다. 학생들은 조금씩이나마 돈이 모아지는 기쁨과 함께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기 시작했다. 1인1통장 갖기 운동은 생각보다 훨씬 좋은 성과를 거두었던 셈이다. 덕분에 나는 한국은행 총재로부터 표창되는 뜻밖의 선물을 받기도 했다.

 

▲ 서귀포재건학교에서 주산 강의(호산)하는 필자(김계담)모습

 

1973년 7월, 재건학교 식구들 모두를 실의에 빠지게 하는 통보가 날아들었다. 농협회관 건물이 처분되어 그곳을 빌려 수업하던 교실을 비워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 재건학교에는 148명의 재학생이 공부하고 있었고, 정동규 교장을 비롯해 20여 명의 자원교사들이 헌신적으로 봉사하고 있었는데, 학업을 중단해야 하는 딱한 처지에 놓여버린 것이다. 1971년 12월에 군 체비지 224평을 입찰해 학교부지 예정지로 선정해놓았지만 예산이 없어 학교건물은 꿈도 못 꾸고 있을 때였다.

마침 방학이 맞물려 있어 7월 25일 방학식을 끝으로 농협회관을 비워주고, 방학 중에 당시 남제주군 여성회관 40평을 빌려 2학기 개학을 했다. 그러나 11월에는 그 임시교실도, 중앙유치원 가교실도 비워줘야 했다. 참으로 딱하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다행히 구 남주중고등학교에서 교실 두 개를 무료로 빌려주었고, 당시 서귀포의 신광전기공사에서 전기를 무료로 가설해 주어 수업을 계속할 수 있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모른다.

더 고마웠던 것은 재건학교 학생들이었다. 교실 한 칸 없이 뜨내기처럼 이리저리 옮겨 다니면서도 불만이나 원망은커녕 그저 학업이 중단되지 않기를 바라며 또 다른 교실을 빌려 공부할 수 있다는데 오히려 감사해할 줄 아는, 미래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의 그 굳세고 착한 마음이 눈물 나도록 고마웠다.  재건학교 자원교사 4년, 주임교사로 2년째 근무하던 나는 새삼 무거워지는 책임감으로 가슴이 터질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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