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11>

1973년 겨울은 참 뜨거웠다. 그해 12월, 2년 전에 입찰 계약했던 재건학교 부지 예정지가 건축 부지로 확정되어 잔여금이 치러지고 정지 작업에 들어간 것이다.

서귀동 260-16번지, 224평의 대지가 그렇게 넓어 보일 수가 없었다. 그곳에 다시는 떠돌지 않아도 되는 교실이 생긴다는 기쁨과 희망으로 학생들도 자원교사들도 다 들떠 있었다. 모두들 손이 부르터도 아픈 줄 모르고 정지 작업에 나섰다. 졸업생들도 나와 팔을 걷어붙였으며, 대한태권도협회 서귀포도장 수련생 20여 명도 손을 보태주는 등 200여 명이 동원되어 정지 작업은 3일 만에 마쳤다. 

▲ 서귀포오석학교 졸업기념 사진 앞줄 왼쪽부터 4번째가 이승학 교감, 그 다음이 필자(김계담) 교장

문제는 건축비용이었다. 당시 남군에서 불우아동센터 시설 자재비로 80만 원을 보조해주었지만 턱없이 부족했다.

서귀포재건학교 건립추진위원회가 결성되었고, 성금운동에 들어갔다. 변성근 씨를 위원장으로 13명의 위원이 꾸려졌는데, 나는 기금관리위원 일을 맡았다. 각계각층의 온정어린 성금이 모아지기 시작해 500만 원의 기금이 마련되었다.

드디어 착공에 들어간 1974년 3월 21일, 그날의 기쁨과 설렘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그해 6월의 감동도 잊을 수가 없다. 두 개의 교실과 한 개의 직원실을 비롯해 숙직실, 화장실 등 부속시설까지 완비된 학교가 완공되었던 것이다. 63평의 건물은 아담했지만 세상 그 어떤 건물보다 빛나 보였다. 그 속에서 다시 태어난 기분으로 더욱 더 열심히 공부하고 씩씩하게 살아갈 것을 서로서로에게 다짐하며 눈시울을 붉히는 학생들의 모습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 서귀포재건학교 준공 기념(1974. 6. 1)사진 왼쪽 두 번째 줄에 서 있는 분이 한창조(경찰관)선생님, 그 다음이 필자(김계담)이며 다음 4번째가 변성근 위원장

1976년 재건국민운동회가 해체되면서 재건학교는 사단법인 마을금고 연합회 학교로 승인되어 학교이름이 ‘서귀포 새마을 청소년 학교’로 바뀌어 운영되었다. 1981년에는 고등학교 과정이 신설되었고, 1986년 3월에는 제주도교육위원회에 ‘한라학교’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었다.

교명이 지금의 ‘오석학교’로 바뀐 것은 1986년 11월 18일의 일이었다. 다음 해 3월 23일자로 나는 오석학교의 교장으로 취임되었다. 고응삼, 정동규, 장완철, 박동광 씨에 이은 5대 교장인 셈이다. 그리고 1988년 10월 사임할 때까지 열정적으로 최선을 다해 학교 운영에 힘썼다.

학원 운영이며 다른 사회활동 등을 함께 하느라고 1967년부터 1988년까지 20년 동안 쭉 이어지진 못했지만 자원교사 4년, 주임교사 4년, 교장 2년, 학교 운영이사 4년 등 오석학교와 인연을 맺었던 14년 동안 500여 명의 학생들을 졸업시켰다. 그 가운데 120여 명의 학생들이 고등학교 입학자격 및 고졸검정시험에 합격해 진학의 꿈을 이뤘으며, 113명이 주산검정시험에 합격해 자격증을 땄고, 150여 명이 취업을 해 당당하게 사회생활에 뛰어들었다.

학교와 학원에서 가르친 수많은 학생들 모두가 사랑스런 제자들이지만, 재건학교 곧 오석학교 제자들에게 유난히 애정을 쏟아서인지 지금도 많은 얼굴들이 생생히 떠오른다.

아직도 서귀포 시내 어디를 가나 오석학교 제자들이 눈에 띄곤 한다. 나를 보면 대부분 한걸음에 달려와 반갑게 인사하지만, 애써 외면하는 제자들도 더러 있다. 아마도 어른이 된 뒤로도 풀리지 않는 궁색한 환경 때문이지 싶다. 나로서야 이산가족 만난 듯 반갑지만 눈길을 피하는 제자의 심정이 가늠돼 아는 체 할 수가 없다.

그런 제자를 본 날이면 하루 종일 마음이 무겁다. 학생이었을 때 좀 더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한 게 후회스럽고, 힘과 용기를 덜 심어준 듯해 미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을 내려놓을 수 없는 것이다. 오석학교와의 시간은 지금도 내 곁을 흐르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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