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시민기자의 귀농일기

▲ 새연교

‘우리는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조상의 빛난 얼을 오늘에 되살려,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 공영에 이바지할 때다....,

1968년 12월 5일 공표된 <국민교육헌장> 서두이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공표되어, 온 국민이 숙지하고 실천하라고 학교에서 외우게 하여 노랫가사로 만들어 외운 기억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그 시대에 태어나고 학교를 다닌 세대들에게는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문장이다. 이념이나 사상, 정치등은 전혀 모르던 어린 아이인 내게는 그것은 가슴 뛰는 구호였고 지향이 되었다.우리는 그렇게, 60년대와 70년대를  ‘잘 살아보세~,노래를 부르며 살아냈던 것 같다.

나의 첫 번째 고향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것들은,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이다.부모님 둥지안에서의 삶이라 주체적이기보다 보호받고 꿈을 키우던 시절이었다.생존의 치열함과 현실은부모님 몫이었지만 내게는 한사람의 개체로 살아내야 할 준비기간이었다.

그때 다진 지식과 지혜, 체력, 성품,꿈등이 내 삶 전체를 좌우하는 방향타 역할을 했었다.이후 내가 홀로서기 하는 동안 만난 여러 가지의 크고 작은 시련들에서 긍정적인 마인드를 유지할 수 있게 된 자양분이 되었다.

80년대서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의 내 삶은 대처를 동경하여 부모님 곁을 떠난 서울살이였다.청년의 꿈과 도전의 시기였지만 가난한 고학생이었던 나는 생존의 절대절명에 직면하여,이상과 현실의 괴리에서 방황하기도 하였었다.

그래도 경제기반의 초석을 다진 우리나라가 부흥일로를 달리게 되어 안정된 일터에서 일에 매진하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대한민국의 경제발전사와 함께 성장해 온 내 삶이기도 하여서 오직 성장을 추구하는 사회에서 나도 모르게 100m달리기를 전력질주하듯 살았다.

빨리 먹고, 빨리 걷고, 숨쉬기도 빨리 했다. 느린 것을 보면 답답했다. 빨리하지 않으면 도태될 것 같아서 모든 것을 빨리 하는 습관이 붙었다. 내가 무엇 때문에 살고, 어떻게 살아야 잘 살고, 후회없는지조차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간간이 자의식이 머리를 들었어도 대세의 큰 흐름에서 이탈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40대 중반까지 그렇게 서울에서 살았다. 두 번째 고향은 열심히 살았던 것 같은데 무엇이 남았는지가 아리송한, 알맹이가 빠진듯한 미진함만 남아있다.

어느날 갑자기 남편 발령으로 찾아온 서귀포살이가 10년이 다 되어 간다. 대처생활을 오래 하여 고향 그리워하며 살아도, 고향으로 돌아가서 사는게 내의지만으로 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내가 사는 곳이 고향이라 생각하며 살기로 하였다.

유기농 귤농부로 거듭나는 동안 내 삶이 치열하고 부대낀 적이 있지만 내가 온전한 주체가 되어 삶을 꾸려가는 자유의지가 생동감을 주고 나를 깨어있게 한다. 삶을 연명하는 것이 아닌 내 의지로 만들어 가게 되어 신이 난다.

때로 노동이 과해서 후줄근해진 모습이 되어도 도시에서의 삶이 도무지 그립지 않다. 목공예와 도자기도 배우고,햇살 밝은 날 감물 염색에도 빠져보며 ,어느 날은 그림도 배우러 가는 삶. 삶의 여가시간을 나를 위해 쏟을 수 있는 여건이 너무나 잘 되어 있는 이곳.
내가 그리던 삶이 이곳에 있기 때문이다.

전에 추구하던 빠름 빠름이, 느림 느림으로 진행되어도 하나도 조급해지지 않는 삶이 되었다. 세번째 고향 서귀포에서 앞으로도 재미지게 자알 살아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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