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12>

1971년 주산, 부기, 타자 등의 검정시험 시행기관인 (사)대한실업교육진흥회의 남제주군지부가 신설되었다. 그 이전에는 제주시로 나가야만 응시할 수 있었던 실업교육 관련 검정시험을 서귀포에서도 치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내가 지부장에 임명됐던지라 당시의 상황을 더욱 잊을 수가 없다.

첫 검정시험은 300여 명의 응시자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회를 거듭할수록 그 수가 빠르게 늘어 최고 2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서귀포지역의 실업교육, 특히 ‘주산’은 붐을 이루었다. 계명주산학원밖에 없었던 서귀포지역에 제일주산학원, 신효주산학원 등이 생겨난 것도 이즈음이다.    

▲ 종합학원에서는 서귀포시 관내 초⋅중학교장의 추천을 받은 학생들에게 서귀포에서 처음으로 컴퓨터를 무료 강의했음.

1974년도 잊을 수 없는 해다. 그해에 서귀2리 355번지, 지금의 아랑조을 거리 1번지에 있는 건물 2층의 60여 평의 사무실을 빌려 학원 장소를 옮겼다. 그리고 타자기 등 시설을 보강하고 부기와 타자 과목을 증설해 명칭도 계명주산학원에서 서귀실업학원으로 바꾸고 새롭게 개원식을 가졌다. 그런데 산남지방에서는 주산, 부기, 타자를 다 가르치는 사설교육학원이 처음 생긴 셈이어서 개원식이 제법 큰 행사가 돼버린 것이다.

당시 이재준 남제구군 교육장이 격려사를, 오광협 서귀포청년회의소 회장이 축사를 해주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나는 “수강생에게는 희망을, 학부모에게는 보람을, 사회에는 실무인재를 양성하는 것을 학원운영의 방향으로 삼겠노라”는 내용의 개원인사를 했었다.

1970년대 중후반 당시 학원비도 여태 기억하고 있다. 학원 입학금은 500원, 월 주산수강료는 900원, 부기는 1,000원, 타자는 2,000원이었다. 1인1기를 적극 장려하던 당시 국가정책에 힘입은 실업기능교육 붐을 타고, 그동안 겨우 현상유지만 하던 학원운영에 흑자가 생기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1977년에는 주산 교재도 직접 만들었다. 당시만 해도 주산을 체계적으로 가르칠만한 교재가 거의 없었다. 무슨 교육이든 기초가 매우 중요한데, 정보가 부족한 시대여서였는지 주산교육의 기초를 받쳐줄만한 교재를 찾아볼 수 없었다. 여기저기 뒤지고 수소문해서 기존의 교재들을 모아봤지만 마땅치 않아 내가 직접 만들어보기로 한 것이다. 그때 어찌나 심혈을 기울여 꼼꼼하게 만들었는지 지금 봐도 보완할 것이 거의 없다.

▲ 당시 전국주산검정 남제주군 시험장소(남주고등학교)에서 응시자가 1000명을 돌파하여 화제가 되었던 감독 위원들 왼쪽부터 오창호, 현상수 선생님 다음이 필자(김계담)지부장 등.

당시 서귀포 삼일인쇄소에서 주산 기초 교재 10,000권과 7급 교재 5,000권을 찍었는데, 인쇄소 직원이 이렇게 많은 책은 처음 인쇄해본다고 놀라워하기도 했다. 그렇게 많이 찍은  덕분에 당시 서귀포 제남보육원생들을 비롯해 봉사강의를 받는 많은 학생들에게 무료로 교재를 나눠줄 수 있었다.

1978년 3월에는 종래의 주산, 부기, 타자 과목에 피아노와 서예 과목을 증설해 ‘서귀포종합학원’으로 승인받고, 이듬해인 1979년에는 미술과목을 증설 했으며 1982년에는 컴퓨터, 웅변, 단과(국.영.수.과)과목을 증설했다. 학원 교육이 보편화되어 가면서 과목별로 학원을 순례를 하는 학생들이 많아지기 시작해, 한 건물 안에서 종합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하고 싶어서였다. 

당시 종합학원은 서귀포는 물론 아니라 제주도에서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나는 학원생들을 결코 종합적으로 보지 않았다. 개개인의 특성을 파악하고 분석했으며, 나름대로 철저하게 수칙을 정해 개별지도를 하고 꼼꼼하고 정성껏 가르치려고 노력했다. 매월 학원 내 검정시험을 치르게 했고, 분기별 대회, 연말 대회 등을 여는 등 실력을 키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 불우한 학원생들을 무료로 가르치고 장학금을 주어 격려하는 일을 더욱 열심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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