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14>
나는 학원과 학교 밖에서 봉사활동을 하느라고 어지간히 바쁜 나날을 보내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새마을금고 연합회와 재향군인회에 관련된 활동이다.
새마을금고 연합회 일은 서귀포오석학교 전신인 서귀포재건학교건립추진위원회 기금관리위원 일을 했던 인연과 닿아있다. 그로 인해 1974년 10월부터 재건국민운동 남제주군 위원회 사무국장 일을 맡게 된 것이다. 사무국의 실무를 담당해야 했으니 일 량이 만만치 않았다. 낮에는 학원과 학교에서 저녁에는 재건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뒤, 재건국민운동회 사무실로 가서 잔무를 정리하다보면 자정을 넘기기 일쑤였다.
1976년 재건국민운동회가 해체되고 마을금고연합회가 창립되자 더욱 바빠졌다. 마을금고 창립 순회 교육 프로그램이 더해졌고, 나 역시 농어민들에게 강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각 마을 별로 회계할 수 있는 사람, 회계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을 뽑아서 농민교육원에서 장부처리 등을 중심으로 회계원 교육을 시키는 게 나의 주된 강의업무였다. 저녁이면 각 마을을 찾아다니는 계몽교육에 참여해 강의했다. 적게는 20여 명에서 많게는 수백 명의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잘 살 수 있는 방법, 농민의 자세, 저축의 필요성’ 등 강의했는데, 아마 산남지방 일대 마을은 거의 다 돌아다녔지 싶다. 그 당시 교육을 받은 주민은 산남에 있는 208개 자연마을의 2만4천여 명에 이른다.
교육의 힘이 헛되지 않아 당시 93개의 마을금고가 창립되었고, 1만3천여 명의 회원에 3억5천여만 원의 자신이 모아져 함께 일한 사람들과 함께 큰 보람을 느꼈던 기억이 새롭다.
서귀포시 재향군인회는 1981년 서귀포가 시로 승격하면서 서귀포시연합분회로 창립되었다. 나는 1983년 이사로 참여하면서부터 재향군인회 활동을 시작했다. 다음 해 부회장을 맡았고, 2년 뒤인 1986년에 제4대 회장으로 선출되어 당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일개 사병 출신으로 재향군인회 회장이 된 것은 전국적으로도 매우 드문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내 나이 마흔넷, 그동안 교육에 관계된 활동만 하다가 교육일선을 떠난 사회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셈이니, 내 개인사에도 특별한 분기점이었다. 한 기관으로 단체장으로 사회의 많은 행사를 주관하고 참여하며 활동하다보니 시야가 확 넓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회장직을 맡은 7여 년 동안 한 달에 서너 번꼴로 크고 작은 각종 행사를 치렀다. 향군의 날 등의 기념식, 안보단합대회, 안보궐기대회 등도 적지 않았지만, 주로 불우아동과 청소년을 돕는 사회봉사, 동 대항 사격대회, 안보교육행사 등을 많이 했다. 특히 안보교육행사는 여러 연사들을 초청해 시민, 민방위 대원, 예비군 등을 대상으로 치렀는데, 내가 회장으로 있었던 7년 동안 무려 4만3천여 명이 교육을 받았다. 회원들의 오랜 숙원이었던 향군회관을 건립했던 것도 잊지 못할 일로 남아있다.
재향군인회 활동은 내게 각종 사회활동을 겸임하게 했다. 서귀포시 청소년 대책 실무위원, 서귀포 시정 자문위원, 범민족 올림픽 추진 중앙협의회 대의원, 서귀포시 행정협의회 위원, 방위협의회 위원, 제주지방검찰청 소년선도위원 등등 직간접으로 관련된 일을 꽤 많이 맡았다. 감투를 좋아한다는 오해를 사기도 했지만, 개인 일을 젖혀두고 참 열심히 뛰어다녔다. 이왕에 맡은 일, 책임감을 갖고 적극적으로 최선을 다하자는 게 내 소신이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잊지 못할 추억이 많다. 88올림픽 성화 봉송 대열에 끼어 횃불을 들고 어린아이 같은 설렘으로 달리기도 하고, ‘서귀포시민상’ 제정을 발언해 성사시키기도 했으며, 난생 처음 외국나들이를 했는가 하면, 거리에 나가 교통정리를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