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계담 시민기자의 돌아본 사회교육 50년 <16>

1990년 7월 5일, 나는 벅찬 가슴으로 백두산 정상에 서있었다. 그해 7월 1일부터 열흘 동안 전국주산교육회 중국시찰단 일원으로 중국을 여행할 기회가 있었는데, 닷새째 되던 날 백두산에 올랐던 것이다.

천지 주변에는 눈이 희끗희끗 쌓여있어 여름철을 무색케 했다. 난생처음이자 언제 또 볼지 모를 장관 앞에서 잠시 넋을 놓고 있다가, 내 여행 가방에서 조심스레 깃발을 꺼내들었다. 백두산의 기운을 받아오고 싶어 챙겨갔던 학원 기였다. 그것을 백두산의 바람으로 펄럭이게 하면서, 서귀포 더 나아가 제주도 사회교육의 발전을 바라는 마음을 담아 기념촬영을 했었다. 되돌아보니  학원계(당시 제주도내 학원 수는 341개소) 분위기는 그 즈음이 가장 활기 있었던 듯하다.

▲ 탐라대학교 고장권 총장으로부터「경영학석사」학위를 받는 필자<오른쪽>(2003.8.29)

내가 학원강사로 사회교육에 첫발을 디뎠던 1963년의 제주도내 학원 수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 직접 학원 운영을 시작했던 1974년만 해도 28개소밖에 없었다.

그러던 것이 점점 늘어 10년 뒤인 1984년에는 130개소가 되고, 또 10년 뒤인 1994년에는 541개소가 되더니, 지금은 1,000개소(2011년 972개소) 가까이로 불어났다. 이는 제주도내 학교 수(방송고교와 대학원 제외하고 295개소)의 3.3배에 달하는 것이다. 학원 숫자만 놓고 보면 괄목할만한 성장이지만, 속사정은 그렇지 않아 안타깝고 걱정스럽다. 하루빨리 학원계를 비롯한 사회교육의 참다운 발전을 위한 방안들이 나오길 기대해본다.

원고 의뢰를 받고 지난날을 더듬으며 원고를 쓰기 시작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연재를 마칠 때가 되었다.
사회교육의 길을 걸어온 지난 50년 동안 자의든 타의든 수많은 직책이 내게 주어졌고, 최선을 다해 그 일들을 해왔다. 헤아려보니 30여 가지의 직책으로 길게는 13년에서 짧게는 6개월까지, 봉사 강의의 날들까지 합치면 모두 96년의 세월을 산 셈이다.

그러나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살아온 세월을 되돌아보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다. 챙겨다주는 것 없이 오히려 주머닛돈을 털어가면서 남을 위해 바깥으로만 나돌았으니 가족들 입장에서는 실속 없는 세월이었던 것이다.

▲ 유인촌 문화관광부장관으로부터「화관 문화훈장」을 받는 필자<왼쪽><2008.10.18)

내 아이들을 위해 내가 한 일이라고는 아이들 학교의 학부모로서 학교교육과 학교발전에 관심을 보인 것밖에 없다. 아이들 학교의 육성회장, 감사 등의 일을 맡아 다른 학부모들과 함께 우천도로 만들기, 수목 조성하기, 인쇄기, 방송기자재를 기증하는 등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썼으니 그나마 위안을 해보지만 미안한 마음은 지울 수가 없다.

가족에게 평생 낙제점수를 면치 못한 남편이요 아버지이지만, 아내와 아이들은 묵묵히 지켜보며 따뜻한 응원을 아끼지 않아 나를 감동시키곤 했다.

내가 공부에 대한 갈증을 포기 못하고 늦깎이도 한참 늦깎이로 대학공부를 시작했을 때도 그랬다. 가족들의 응원에 힘입어 2001년 탐라대학교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내친김에 경영대학원에 진학해 61세 되던 해인 2003년에 경영학 석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내 책장에는 1998년 교육부장관 표창과 2008년 대통령 화관문화훈장을 비롯한 25개의 표창장․패, 향군휘장을 비롯한 23개의 공로장․패 그리고 경찰청장 감사장를 비롯한 27개의 감사장․패가 제법 넓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50년을 96년으로 늘여 살았던 지나온 길의 증표이기도 한 그것들을 볼 때마다, 봉사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았던 내 선택과 노력이 서귀포지역 사회교육 역사에 조금이라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쳤기를 바라곤 한다.
그동안 미흡한 글을 읽어주고 격려를 보내주신 독자들께 고마운 마음 전하며 연재를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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