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가정 - 우리가 지켜야 할

세상이 너무 빠른 속도로 변화한다. 초등학교 다니는 딸아이는 이메일로 나에게 편지하는 것이 일상이 되었고, 부부간에도 이메일이 달콤한 대화를 대신한다. 인터넷과 휴대전화가 없는 젊은이들의 문화는 상상할 수 없게 되었고, 우체통에 편지가 사라졌다. 그러나 그 형태가 이메일이 되었든 문자메시지가 되었든 글자를 통한 의사소통은 여전히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인간관계를 맺어주고 있다.우리가 흔히 전통적이라고 말하는 부모님 세대의 가정에서부터 흔히 현대적이라고 말하는 젊은 신세대들의 가정까지 그 변화의 폭과 속도 역시 대단히 큰 변화를 겪었다. 가부장적인 생활형태가 서서히 무너지고 남성이 경제력을 쥐고 가정을 좌지우지하는 시절도 거의 종말을 고해간다. 부모님 세대의 가정에서는 아버지의 말 한마디가 집안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법이었고, 아버지는 위엄의 상징이었다. 그것은 사회적 관습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침묵 속에서도 위엄으로 가정을 통제해야 훌륭한 아버지의 모습으로 비쳐졌고, 우리들이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은 항상 조용하시고 위엄 있으시면서도 인자하신 미소를 잃지 않는 그런 모습이다.반면에 어머니에게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말 그대로 현모양처이면서 충실한 노동력의 역할을 군말 없이 수행하시는 그런 모습이다. 하루 종일 농사일에 집안일까지 뼈빠지게 일하시면서도 남편에게는 순종하고 자녀들에게는 엄격하신 그런 모습이 흔히 우리가 그리는 어머니의 모습이다.그 속에서 우리 자녀들은 신나게 뛰놀고 천방지축이긴 하지만, 도덕을 중시하고 남을 배려하는 부모님의 문화적 성숙을 그대로 물려 받아서 심성이 곱고 훌륭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된다.그런데 이 말들이 정말 다 맞는 말일까? 혹시 동화책이나 소설에나 나오는 거 아닐까? 진짜 우리들의 진실된 얘긴가? 그럼 소위 신세대가정으로 지칭되는 현대적 가정은 어떤가? 당연히 핵가족이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시골에 사시고 엄마와 아빠 그리고 한두명의 자녀가 한 가족을 이룬다. 직장에서 퇴근하는 남편은 밝은 표정으로 과일 한 봉지를 사들고 집으로 돌아오고 아내는 저녁을 짓다가 남편을 맞는다. 식사 후 남편은 설거지를 하고 아내는 빨래를 한다. 부부는 서로 공평하며 사랑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아이들은 말 그대로 천방지축이고 버릇이 없다. 가끔씩 아내가 아이에게 고함을 치고 남편은 오히려 아이를 달래고 인자하게 어우른다. 부부싸움은 자녀문제로 인한 경우가 가장 많다. 정작 부부만 있으면 정말 서로 사랑하며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은데 자녀문제가 항상 둘 사이를 가로막아 피곤하게 한다. 그래서 자녀를 갖지 않는 부부들도 늘어간다.그런데 정말 우리 핵가족 이웃들이 다 이럴까? 그냥 텔레비전 드라마에나 나오는 얘기 아닌가? 진짜 우리들의 얘긴가? 세상이 변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오히려 더 많다. 물을 동그란 컵에 담으면 동그랗게 되고 사각 컵에 담으면 사각형이 되듯, 형식만 변했을 뿐 본질은 변화하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가정이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문화나 생활을 보면서 단지 역사로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그때의 가정이나 지금의 가정이나 변화한 본질은 하나도 없다. 또 미국이나 아프리카 이야기를 보면 문화와 생활환경이 다 다르지만 가정은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가정이야기에 우리는 피부로 공감하고 우리와 똑같다고 고개를 끄덕인다. 과거나 현재나, 외국이나 우리나라나 공통적으로 가족구성원은 부모와 자녀의 공동체이고, 그들을 이어주는 끈은 신뢰와 사랑이다.아무리 이혼률이 높아지고 자녀들의 부모에 대한 신뢰가 없어진다고 해도 가족은 영원하다. 핵가족이든 전통적 가정이든 그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일 뿐이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본질이다. 그 본질을 아끼고 키워서 모두에게 공유시키는 것이야말로 가정을 가꾸는 일이다. 그리고 그 본질은 사랑과 신뢰이다.내가 결혼하게 되었을 때 내가 존경하는 분께서 내게 물었다. "이제 가정을 꾸리게 될텐데, 가정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사랑입니다." "그래? 근데 그게 뭔데? 그건 추상일 뿐이야. 추상보다는 실천할 수 있는 구체적 내용이 필요해. 난 그게 배려(care)라고 생각하네." 난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추상을 구체적으로 실천하기 위해 지금도 노력하고 있다.사랑과 신뢰라는 추상성을 채우는 것은 배려와 대화이다. 가족간에 진실되게 배려하는 것, 그리고 가족간에 여러 방식을 통하여 대화하는 것. 이것이 사랑과 신뢰를 이루는 길이다. 전통적 가족이든 현대적 가족이든 이 두 가지를 상실하는 가족은 가족답지 못할 것이고, 이 두 가지를 채우는 가족은 가족다울 것이다.마지막으로 어떤 책을 읽으며 가장 가슴에 와 닿았던 말로 마무리하고 싶다."우리가 자녀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배우자를 사랑하는 것이다."김원범/본지 발행·편집인제246호(2001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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