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예전 서귀중학교는 남녀 공학이었다. 우리도 처음에는 여학생들만 따로 한 반이었다가 피난 왔던 아이들이 하나 둘씩 떠나버리자, 남학생들 반(A, B, C)에 여남은 명씩 끼워 넣어졌다. 그 당시여학생은 법환동에 두 명, 신하효동 세 명, 서홍동 세 명, 보목, 토평동이 한명씩이고, 호근동이 다섯 명으로, 변두리 아이들을 다 합쳐도 여학생은 고작 삼십 여명도 채 안 되었다. 숫자적으로 열세라 남자들에게 주눅 들것 같았지만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고르지 못한 교실 바닥은 흙먼지가 폴폴 날리고, 제주 돌담으로 얼기설기 쌓아올린 가교사는 비가 올 때면 빗물이 새어들곤 했다. 햇살 좋은 날이면 교실 밖 둔덕에서 학생들이 풀베기 작업도 했다. 나도 그때 풀을 베다다 순간의 부주의로 손가락이 낫에 상처를 입었다. 초등학교 때 베었던 그 자리에서 고작 3미리 정도만 빗나갔을 뿐, 내 왼손 장지손가락이 또 수난을 겪은 셈이다.

▲ 서귀중학교 제11회 졸업기념

우리들 중에는 초등학교 1~ 2학년 선배들도 다섯 명이 함께 수업을 받았다. 그들이 우리에게는 백 그라운드였다. 사고 칠 때도 그 중 한명은 늘 우리와 함께였다. 언젠가 선생님 몰래 5~6 명이서 극장엘 갔는데 우리들의 책가방을 모두 교무실로 가져가 버렸다. 또 한 번은 훈육주임 선생님께 들켜서 도망을 친다는 게 남의 집 굴묵(방에 불 때는 곳)에 모두 머리를 쳐 박으면 되는 줄 알고, 엉덩이를 뒤로 내민 채 숨어 있다가 한사람씩 끌려 나오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 일로해서 우리는 남학생들 앞에서 호되게 벌을 받았다. 선생님은 남학생들 앞에 우리들을 세워놓고, 이쪽에서 밀치면 저쪽으로 쓰러지고, 저쪽에서 밀치면 이쪽으로 쓰러지는 도미노 현상을 연출했다. 그렇게 부끄러운 곤욕(?)을 치루면서도 다시 또 휩쓸려 다녔으니 그때는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군중심리라고나 할까. 우리들 한 사람 한사람은 더 없이 착하고 얌전한 아이들이었는데… 

어느 날은 학교 울타리 담을 뛰어 넘어 남의 무덤 앞에서 절을 하고 난 뒤,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 떼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 라는 동요에 맞춰 율동을 하기도 했다. 어쩌면 우리가 했던 그 행동들은 무덤 안의 어느 분에게  바치는 위로의 가무(歌舞)라고나 할까. 돌이 굴러가도 깔깔 거리며 웃던 시절, 얼마나 철부지들이었으면 그랬을까. 요즘 왕따라는 개념을 우리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곳에서 몇 발자국만 더 내려가면 깨끗한 물이 흐르는 정방 수원지(정모시)다.  시골 아이들이 꽁보리밥에 반치지(장아찌)를 싸오면 얻어먹는 맛 또한 별미였다. 학교 갔다 오면 책가방을 휙 내 던지고 솔동산 밑에 있는 숙이네 집(낙원식당)으로 달려간다. 그 집 부엌에 쪼그리고 앉아 무쇠 솥에 푹 퍼진 꽁보리밥을 퍼서 후후 불어가며, 쭉쭉 찢어 놓은 김치를 얹어 한 입 가득 채워먹는 그 맛을 요즘 아이들은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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