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그 때는 타지에서 온 사람들 중 공무원이든, 학교 선생님이든, 낙원식당에서 한 끼라도 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게다. 그만 큼 그 식당은 유명 했다. 바로 그 옆에는 대호 다방이 있어서 아베크족들의 아지트로 만남의 장소였다. 그 낙원식당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시절, 오지랖 넓은 숙이는 귀찮기도 하련만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우리들의 성화(?)를 다 받아 줬으니 그 공을 어찌 다 갚으랴.
그녀는 결혼 후, 수의사인 남편을 따라 충청북도 괴산에서 살았다. 큰 아이가 군 입대를 하고 훈련을 마치는 날, 나는 논산 훈련소로 아들 면회를 갔다. 그 친구는 내 아들을 먹이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남편까지 앞세워서 그 먼 길을 달려 왔다. 그 후 친목계에서 수안보 온천으로 여행을 갔을 때도 그녀는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남편과 함께 호텔까지 와서 우리들을 푸짐하게 대접하고 갔다.
항상 베풀기만 했던 낙원식당 집 딸 숙이는 지금 중문 천제연 입구에서 놀멍, 쉬멍, 머~그멍(시니어 클럽)이라는 식당을 몇 사람이서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음식솜씨 좋은 그 친구는 지금도 국수 하나를 말아주면 아직도 그 맛이 일품이다. 세월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흘러갔지만 지나버린 날들에는 그리움이 한 켜 한 켜 묻어있다. 어느덧 노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나는 다시 또 소녀시절을 추억해 본다.
중학교 일학년 가을, 첫 운동회 날이었다. 요즘 훌라후프처럼 대나무를 둥글게 만들고 거기에 하얀 종이꽃을 매달아놓은 것을 들고 여학생들은 무용을 했다. 관중들의 박수갈채 속에 매우 잘 했다는 호평을 받았으며 요즘 말로 인기 짱이었다. 그때 서귀포에는 유명한 남자 무용선생님(이상준)이 계셨다. 당시 선생님은 남해여관에 머물면서 많은 여성들에게 무용을 가르쳤다. 우리는 그때 생소한 춤인 스포츠댄스 같은 것도 그 선생님께 배워서 운동회 때 무용을 했다. 아마 그것이 요즘 마스게임이라고 할까. 남학생들은 우리 여학생 몇 사람을 왈패로 칭했다. 우리들 중 누구 한 사람만 지나가도 야! 왈패 간다!라고 쑤군거렸다. 더구나 남학생들이 우리 앞을 지나가려면 주눅이 들어 혼자는 못 지나갔다고 했다. 나중에는 선생님들에게까지 그 말이 전달되어 우리는 완전히 왈패로 통용 되었다. 혼자일 때는 그렇게 얌전한 아이들인데 뭉치면 어디서 그런 끼가 발동 했는지…선생님들의 별명은 또 얼마나 잘 지었던지. 키가 크고 말상같이 생긴 훈육 주임 선생님을 몰대가리로, 꼬장꼬장하고 비쩍 마른 역사 선생님을 해골바가지로, 영어선생님은 if there are로 지었다. 또 외국 영화배우처럼 예쁜 여선생님을 고냉이(고양이)로 불렀다. 그 선생님은 정말 늘씬하고 잘 생긴 영어 선생님이다. Stand up(일어나)하고 일어나서 영어를 읽지 못하면 누구도 봐 주는 일 없이 아무리 여학생이라도 여지없이 뺨을 때린다. 아마 영어를 못하는 아이가 선생님이 얄미워서 그런 별명을 지었을 터다.
초간단가입절차 개인정보x 각종인증x HD 풀화질 실시간라이브
각종이벤트머니 초대박지급 세계최강 막강한자본력! 5분내 입출금완료
복사하셔서 주소창에 붙여넣기만 하시면 이동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