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그 때는 타지에서 온 사람들 중 공무원이든, 학교 선생님이든, 낙원식당에서 한 끼라도 밥을 먹어보지 않은 사람은 별로 없었을 게다. 그만 큼 그 식당은 유명 했다. 바로 그 옆에는 대호 다방이 있어서 아베크족들의 아지트로 만남의 장소였다. 그 낙원식당이 문전성시를 이루던 시절, 오지랖 넓은 숙이는 귀찮기도 하련만 싫은 내색 하나 없이 우리들의 성화(?)를 다 받아 줬으니 그 공을 어찌 다 갚으랴.

그녀는 결혼 후, 수의사인 남편을 따라 충청북도 괴산에서 살았다. 큰 아이가 군 입대를 하고 훈련을 마치는 날, 나는 논산 훈련소로 아들 면회를 갔다. 그 친구는 내 아들을 먹이기 위해 음식을 장만하고 남편까지 앞세워서 그 먼 길을 달려 왔다. 그 후 친목계에서 수안보 온천으로 여행을 갔을 때도 그녀는 먹을 것을 바리바리 싸들고 남편과 함께 호텔까지 와서 우리들을 푸짐하게 대접하고 갔다.     

▲ 1955년 12월 어느날 친구들과. (왼쪽에서 두 번째가 필자)

항상 베풀기만 했던 낙원식당 집 딸 숙이는 지금 중문 천제연 입구에서 놀멍, 쉬멍, 머~그멍(시니어 클럽)이라는 식당을 몇 사람이서 함께 운영하고 있다. 음식솜씨 좋은 그 친구는 지금도 국수 하나를 말아주면 아직도 그 맛이 일품이다. 세월은 구름처럼 바람처럼 흘러갔지만 지나버린 날들에는 그리움이 한 켜 한 켜 묻어있다. 어느덧 노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 나는 다시 또 소녀시절을 추억해 본다. 

중학교 일학년 가을, 첫 운동회 날이었다. 요즘 훌라후프처럼 대나무를 둥글게 만들고 거기에 하얀 종이꽃을 매달아놓은 것을 들고 여학생들은 무용을 했다. 관중들의 박수갈채 속에 매우 잘 했다는 호평을 받았으며 요즘 말로 인기 짱이었다. 그때 서귀포에는 유명한 남자 무용선생님(이상준)이 계셨다. 당시 선생님은 남해여관에 머물면서 많은 여성들에게 무용을 가르쳤다. 우리는 그때 생소한 춤인 스포츠댄스 같은 것도 그 선생님께 배워서 운동회 때 무용을 했다. 아마 그것이 요즘 마스게임이라고 할까.  

남학생들은 우리 여학생 몇 사람을 왈패로 칭했다. 우리들 중 누구 한 사람만 지나가도 야! 왈패 간다!라고 쑤군거렸다. 더구나 남학생들이 우리 앞을 지나가려면 주눅이 들어 혼자는 못 지나갔다고 했다. 나중에는 선생님들에게까지 그 말이 전달되어 우리는 완전히 왈패로 통용 되었다. 혼자일 때는 그렇게 얌전한 아이들인데 뭉치면 어디서 그런 끼가 발동 했는지…

선생님들의 별명은 또 얼마나 잘 지었던지. 키가 크고 말상같이 생긴 훈육 주임 선생님을 몰대가리로, 꼬장꼬장하고 비쩍 마른 역사 선생님을 해골바가지로, 영어선생님은 if there are로 지었다. 또 외국 영화배우처럼 예쁜 여선생님을 고냉이(고양이)로 불렀다. 그 선생님은 정말 늘씬하고 잘 생긴 영어 선생님이다. Stand up(일어나)하고 일어나서 영어를 읽지 못하면 누구도 봐 주는 일 없이 아무리 여학생이라도 여지없이 뺨을 때린다. 아마 영어를 못하는 아이가 선생님이 얄미워서 그런 별명을 지었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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