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시험 보기 전날은 친구 집에 모여 공부 한답시고 밤새 자다 깨다 놀다가 공부는 뒷전이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또 다른 숙이네 집에 가서 튀김이며 부침개도 부쳐 먹었다. 그 숙이는 나와 티격태격 많이도 다투었던 어릴 적 친구다. 키는 작았지만 야무졌던 그 아이, 내가 고등학교 다닐 무렵, 부모님 찾아 일본으로 건너가 다시 북송선을 탔다는 풍문에 가슴이 시렸다. 그녀는 지금 북에서 살아있기는 할까.

 

나의 중학교 시절은 프랑스 영화에 나왔던 캉캉 춤이 한참 유행하던 때였다. 학교에서 내려오는 길은 매우 경사로였다. 그 곳을 내려 올 때 우리는 길을 다 막듯, 한 줄로 쭉 늘어서서 치마를 펄럭이며 신나게 캉캉 춤을 추며 내려왔다. 춤을 배운 것도 아닌데 입으로는 '육구육구 사꾸사꾸' 하고, 오른쪽, 왼쪽으로 정강이를 번갈아 올리면서 율동을 했다. 그 '육구육구 사꾸사꾸란 뜻이 무엇인지 나는 모른다. 그래도 멋모르고 행동했던 소녀 적 그 추억들이 가슴을 뛰게 한다.

내 소녀시절을 살찌웠던 자구리 바닷가도 있다. 놀이터가 변변히 없던 시절 자구리 바닷가는 우리들의 놀이공간이었다. 그곳은 용천수가 펑펑 쏟아져 나오는 곳이다. 아낙들은 이불 빨래도 활활 행구는 공동 빨래터였다. 윗물에서는 '송키'(야채)도 씻었다. 여름이면 시원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물이 용천수다. 여름날 나는 핑계 삼아 옆구리에 빨래 몇 가지를 끼고 '자구리'로 간다. 옷들을 빨고 난 뒤 깨끗한 돌 위에 널어놓고, 넘실대는 바다로 첨벙거리며 뛰어들어 수영도 했다.

중학교 1학년 운동회 때. 가운데가 필자. 
밀려오는 파도에 봉(바닷물)을 먹을 때도 여러 번 있었다. 헤엄을 잘 치는 아이들은 '소남머리' 바위까지 갔다 오기도 하지만, 심약한 나는 한 번도 그러지를 못해 그네들이 부러웠다. 입술이 새파래지도록 추워서야 바다에서 나와 햇볕에 데워진 자갈돌 위에 엎드렸다. 온 몸이 따뜻해 졸음도 슬슬 밀려오곤 했다. 해가 뉘엿뉘엿 질 때야 담수에 몸을 깨끗이 헹구고, 집으로 돌아오던 그 시절이 엊그제만 같은데 어느새 수 십 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서귀포에 계속 살면서도 어릴 적 놀던 '자구리' 바닷가를 가지 못했다. 예전 '자구리'로 가는 길 오른쪽엔 '제남 보육원이 있었고, 왼쪽은 도축장이 있어서 간혹 돼지들의 단말마 소리도 들려오곤 했었다. 얼마 전, 가랑비는 소리 없이 내리는데, 입구로 내려가니 새로 물막이를 해놓은 빨래터가 있었다. 밀물 때라 안쪽으로 넘어 갈 수가 없어 오후 썰물 때가 되서야 그곳으로 건너가 보았다. 

어릴 적 뛰놀던 '자구리' 해안가는, 파도가 밀려가고 밀려오며 옹기종기 깔려있는 잔 돌들을 어루만지는 곳이었다. "아! 이곳도 많이 변했구나." 어느 해 풍우엔지 사태 져 무너져, 까르르 웃던 아이들의 웃음소리도, 아낙들의 빨래 방망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돌 틈으로 흘러나오는 담수만이 여전히 바다로 흘러들고 있었다. 파도소리는 옛일을 그립게 하고, 시큰거리는 눈가엔 회한이 서린다. 옛 흔적만을 확인한 채 발길을 돌렸다. 긴 세월 모진 풍상에 어찌 변하지 않기를 바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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