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쉼팡]‘고추 어멍’에서 ‘감자어

요즘 나는 고추나무 뽑느라 바쁘다. 아이들이 뭍나들이를 가고 없어 집안일에 신경 쓸 필요도 없이 열심히, 틈 나는 대로 고추나무를 뽑아가고 있다. 봄 감자를 심기 위해서다. 물론 시기적으로 늦긴 했다지만 그만큼 수확을 늦게하면 될 것 같아 도전해 보기로 했다.씨감자를 사다 뒷뜰에 쌓아둔 터라 마음은 바쁘지만 일은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 고추나무만 쑥쑥 뽑아내는 일이라면 더딜 것도 없지만 몇 개씩 세워둔 지지대와 가지마다 묶어놓은 끈을 일일이 잘라 뽑아야 하니 그럴 수 밖에.하우스 천장을 관통하는 스프링 쿨러관에 연결하여 묶어놓은 고추끈을 자르는 일은 물론 묶는 일보다야 쉽다. 대나무나 쇠파이프로 세워둔 지지대도 박는 일보다야 뽑기가 더 쉽다. 그 무거운 여름날 우리 부부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비닐하우스 안에서 보냈던가. 그러다가 하우스병 걸리겠다며 우려하는 이웃들의 충고에도 아랑곳없이 문턱이 닳도록 드나들며 좀 더 긴 쇠파이프로 지지대를 바꿔 세우고, 비바람에 쓰러지지 않도록 끈으로 묶어주는 일로 하루가 가는 줄을 몰랐다.제초제를 뿌리지 않은 탓에 하루가 다르게 커버리는 잡풀을 뽑느라 고생했던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태풍이라도 북상하는 날이면 비닐이 찢어지지나 않을까, 하우스가 내려앉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외출을 미루면서까지 눈길을 떼지 않던 몇 날 밤까지 보태면 그야말로 우리밭 고추는 우리 부부의 사랑과 정성을 고스란히 먹고 자란 내 ‘새끼들’이나 다름없다.그 때문인지 약 한번 뿌리지 않았어도 탐스런 열매가 맺어주어 여름 한 철 반찬값을 벌 수 있었다. 붉게 익은 고추는 잘 말려 빻아 팔기도 했는데 그 양은 많진 않았지만 아는 사람들은 앞을 다투어 사갈 만큼 인기가 좋았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고추를 다 뽑고 감자를 심으려 한다. 병충해가 심해 약없인 키울 수 없다는 고추를 무농약으로 재배해 본 경험을 바탕으로 무농약 감자 재배에 도전하려는 것이다.고추는 늘 잔손을 필요로 하면서도 결국 푼돈만 벌어주기 때문만은 아니다. 음식에 곁들여지는 양념에 불과한 고추보다는 끊이지 않는 먹을거리를 만들어낼 수 있는 감자에 더 큰 매력을 느껴서이다.도시에서 살때 이웃과 어울려 감자 한 상자를 사서 절반씩 나누어 온 날이면 얼마나 마음이 든든했던가 그 생각이 나서이다.반찬거리가 궁할 때면 된장찌개를 끓이기도 하고, 감자국을 만들기도 하고, 갈아서 감자전을 부치거나 채썰어 기름에 볶기만 해도 밥상은 이내 푸짐해지지 않던가. 입이 심심할 때 뜨끈하게 삶은 감자를 고운 소금에 찍어 먹으면 따로 밥을 먹지 않아도 되었던, 어린 시절 풍성하기만 했던 간식 겸 주식이었던 감자를 우리 손으로 재배해 보자는 계획을 세웠을 때 우리 부부는 정말 농꾼이 되었구나 싶어 감격스럽기까지 했다.우리 하우스면적으로는 좀 좁다 싶어 마을의 어른에게 밭을 빌려 거기에도 농수산 하우스를 짓고 있다. 마침 서귀포의 이영민 선생님이 밭에 세워둔 농수산 하우스를 철거해가도 좋다고 하셔서 남편은 요즘 그 일에 매달려 있다.이제 머잖아 천평 남짓한 하우스 가득 감자싹이 돋아날 것이다. 물론 화학비료나 농약, 제초제는 전혀 쓰지 않고 우리 방식대로 키울 것이다. 미생물 발효시킨 액체비료를 듬뿍 먹여 키운 감자는, 희끗희끗 날선 서릿밭이 내려앉은 잘익은 수박의 속살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하얀 속살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푸석푸석한 섬유질만 씹히는 게 아니라 옛날 맛보았던 고소함과 풋풋함도 그대로 살아있을 것이다. 이제 그 건강하고 맛난 것을 많은 사람과 나누어 먹는 일만 남았다.그러노라면 판로를 뚫기 위해 얼마간 우리 부부는 골머리를 앓아야 하겠지만 그마저도 즐거운 일이다.우리가 열심히 농사지어 그 결과물을 많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일, 그것은 무농약 농사라는 희망을 나누어 갖는 일이나 다름없으니 말이다.감자는 올해 우리 부부의 또 하나의 희망이다. 서툴면 서툰대로 더 열심히 몸으로 때워가며 감자의 싹을 피워올리고 잎새를 피워올릴 것이다. 첫아이에게 갖은 정성과 애정을 쏟아가며 육아의 경험을 쌓아가는 젊은 엄마처럼, 올 한해 우리는 그렇게 조심스럽게 농사를 시작하고 있다.조선희/남군 표선면 토산리제246호(2001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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