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충근 시민기자의 식물이야기

며칠 전에, 제주 서쪽 마을에 갈 일이 있었습니다. 길치는 불치인지 이번에도 길을 찾지 못해 빙빙 돌아다녔습니다. 덕분에 ‘잣’을 덮은 송악은 실컷 보고 왔습니다.

밭에서 나오는 돌들을 주워 쓸 수 없는 땅이나 이웃 밭과 경계인 발담 따라 쌓은 돌무더기가 잣입니다. 철마다 농부의 손끝으로 돌들이 켜켜이 쌓이면 나이테처럼 넓어지고 나중엔 그 위로 소와 사람이 다닐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잣에는 송악이 자라도 괜찮은지 송악 덤불이 많았습니다.
 
밭담은 돌들을 그냥 얹혀 놓은 듯 보이지만 잘 쌓은 밭담은 돌덩이들이 서로 맞물려 있습니다. 그러기에 흔들면 통째로 흔들릴 뿐 웬만해서는 ‘크러지지’ 않습니다. 이런 잘 쌓은 돌담도 송악 따위가 번성하면 바람에 쉬 무너집니다. 송악의 헛뿌리가 담을 움켜쥔 모습은 매우 단단해 보입니다만 바람이 돌담 구멍으로 빠져나가지 못하기 때문에 해롭습니다.

송악은 돌담뿐만 아니라 나무에도 달라붙어 삽니다. 이 송악처럼 평지 보다는 오를 ‘대상’이 있을 때 더 잘 사는 식물들이 많습니다. 노박덩굴, 칡, 등나무, 줄사철나무, 마, 마삭줄, 멀꿀, 다래 등인데 대상에 오르는 방법은 종에 따라 정해져 있습니다. 크게 나누면 빙빙 돌며 올라가는 식물이 있고, 무턱대고 오르는 식물 그리고 처음부터 헛뿌리를 내며 붙어 오르는 식물이 있습니다.

이들은, 택한 대상이 식물일 때 거의 전부, 지주로 삼은 그 식물을 괴롭힙니다. 영양분을 두고 싸우고 어떤 덩굴은 지주식물을 올라타 누르며 햇빛을 독차지합니다. 더욱이 감아 오르는 식물은 지주식물을 홀타지게 만듭니다. 지주식물도 살아 있는 한 계속 살찌므로 덩굴식물이 감은 부분은 조여져 결국 기형이 되고 맙니다.

또한, 줄기식물이 번성하면 바람에 지주식물이 부러지는 일도 생깁니다. 지주식물이 잘 살아야 그곳에 세든 식물도 좋을 것 같은데 저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큰바람이 불고 나면 종종 넌출에 휘감긴 나무들이 쓰러진 모습을 볼 수 있는데, 넌출 때문에 부피가 커 바람을 많이 탔고 또한 애초 생장을 제대로 하지 못해 화를 당했을 겁니다.

이런 것을 알아 그런 것인지 우연인지는 모르나 송악이 나무에 올라 살 때는 지주로 삼은 나무를 배려하는 것 같습니다. 태생이 그래서 누군가에 의지해 살 수밖에는 없지만 그래도 염치가 조금은 남아있는 듯한 모습입니다. 자기가 택한 지주식물에 딱 붙어 오를 뿐 가지를 이리저리 뻗어 이웃에 사는 다른 나무까지 차지하는 욕심이 없습니다. 대부분 줄기식물들은 양다리 걸쳤다가 종국에는 자기가 좋은 곳으로 가는데 그러지 않는 것입니다. 그저 조용히 지주식물 줄기 따라 자랍니다.

그리고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자기가 사는 나무를 딛고 더 높이 자라지도 않습니다. 지주로 삼은 식물이 자란 만큼만 자랍니다. 이런 심성을 가진 나무라서 겨울 초입에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 같습니다. 주인나무가 잘 살고 난 후 잎 질 때를 기다려 나뭇가지 사이로 들어온 햇빛으로 꽃 피우고 열매를 맺는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물론 저는 알지 못하지만, 생태적인 다른 이유는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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