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내 어릴 적 가을 산에는 먹을 것이 지천이었다. 친구들 중 누군가가 “야! ‘폿볼레 따먹으러 산에 가게!” 해서 우리는 가을 소풍 겸 ‘폿볼레’(작은 보리수)를 따러 산으로 갔다. 친구 집에서 송편을 빚고, 도시락도 싸서 웃음도 함께 넣어 산에 올랐다.

그때만 해도 가까운 산 중턱에만 가면 ‘폿볼레’ 나무에 팥처럼 작은 열매들이 참 많이도 달렸었다. 어린 아기 얼굴에 홍조마냥 곱게 익은 연분홍빛 ‘폿볼레’를 실컷 따먹고도 다시 또 보자기에 싸서 집에까지 가지고 왔다.  

 어느 초여름 날, 선생님들과 함께 ‘새섬’으로 소풍을 갔다. 키 작은 체육선생님은 도토리처럼 탄탄해 보이는 이○○ 선생님이셨고, 지리 선생님은 영국 신사처럼 키도 크고 멋있는 하○○ 선생님으로 두 분 다 여학생들이 좋아했다.

지금은 ‘새섬’으로 가는 다리가 놓여 있어 산책 코스로 방문객들도 많이 늘었지만, 그때는 썰물일 때만 바닷가 자갈 길(일제 때, 고래공장이 있었던 곳)을 지나 ‘새섬’으로 건너가곤 했다. 우리는 그곳에서 사진도 찍고 고동도 잡으며 하루를 즐겼다. 그날 앞바다에는 커다란 고래가 물살을 가르며 지나가고 있었다.

 내가 중학교 다닐 때는 감청색 교복을 입고 다녔다. 쌀풀을 빳빳하게 먹이고 반들반들 다림질을 한 하얀 칼라는 여학생들의 트레드 마크였다. 학교에 갔을 때 갑자기 비라도 내리면, 우산을 갖다 줄 사람도 없고, 지금처럼 버스나 자가용이 없을 때라 그냥 비를 맞으며 집에 올 수밖에 없었다. 교복에서는 물이 빠져 하얀 칼라에 검은 물이 번지고, 스커트에서 흘러내린 검정 물이 종아리에도 번지곤 했다.

4․3을 겪은 후 내 어머니는 포목장사를 했다. 부산 범일동 시장에 가서 물건을 사다가 장돌뱅이처럼 오일장날이면 중문 장에도 가고 남원 장에도 갔다. 여러 상인들이 트럭에 물건을 싣고, 그 위에 사람들도 함께 타고 다녔으니 오르막이나 내리막길에서는 사고 날 때도 종종 있었다. 얼마나 아찔한 상황이었을까. 그렇게 힘들게 고생을 하며 오빠들을 대학까지 공부까지 시켰다. 

 나는 어머니의 그런 어려움도 모르고 육지로 물건을 하러 갈 때면 “어머니 나 수영복 하나만 사다줘 예?” 하고 아이처럼 보채기도 했다.

그 덕에 나일론 양말이 처음 나올 때도 친구들 보다 먼저 예쁜 색동양말을 신었고, 여름이면 다른 아이들은 속 고쟁이나 무명옷을 입고 수영을 했지만 나는 빨간 수영복을 입고 헤엄을 쳤다. 볼품없이 비쩍 마른 몸매에 수영복을 입고 자랑을 하듯 했으니 보는 이들이 얼마나 웃었으랴. 지금도 그 생각을 하면 얼굴이 붉어진다.

 지금 매일 올래 시장이 예전에는 오일 장터였다. 그 후 서귀포시 보건소 근방으로 오일 시장을 옮겼다가 전천후에도 장이 설 수 있도록 지금의 오일시장 터로 다시 이전한 것이다. 지금 올래 시장이 예전 오일장터였을 때, 장날이면 나는 점심시간 되기가 무섭게 어머니에게 용돈(과자 값)을 타러 갔다. 어머니가 돈을 주실 때까지 기둥을 붙잡고 늘어졌다. 귀찮아서도 어머니는 내게 돈을 주셨을 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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