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고등학교 2학년 시절.
1948년은 미친 듯 휘몰아친 4·3의 광풍에 우리 집과 가재도구는 모두 불태워 졌고, 6·25는 예비검속으로 아버지마저 희생 됐다. 할아버지에게 내 아버지는 세상에 둘도 없는 잘난 아들이었다. 미친 광풍에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고, 사십대 초반인 그 잘난 아들을 할아버지는 당신 가슴에 묻어야했다. 아버지가 그렇게 되신 후 어머니는 신산한 삶에도 집을 완공 시켜 할아버지 내외분을 솔동산 우리 집으로 모셔왔다.

 

시골에서 순박하게만 살던 할아버지는 허허로운 마음 붙일 곳 없어 호미(낫)하나 들고 산과 들을 헤매며 새(띠)를 비어다 소일거리를 삼았다. 우리 집에 와서도 작고 둥근 멍석(돌래석)을 만드실 때면 입에 물을 가득 물고 있다가 풀어 놓은 볏짚에 ‘푸우’하고 내뿜었다. 볏짚이 촉촉해지면 ‘덩드렁마께’(나무토막으로 만든 투박한 방망이)로 한참을 두들긴다. 골고루 두들겨진 짚을 다시 몇 겹씩 꼬아가며 멍석 짜기를 하셨다.

입속에 머금었던 물을 내뿜을 때면 맺혔던 한(恨)을 토해내듯 뿜어내셨고 덩드렁마께로 볏짚을 두드릴 때는 가슴속 응어리를 쏟아내듯 힘껏 내리치던 할아버지!
세파의 소용돌이에 아들을 빼앗긴 할머니는 한 쪽 눈이 실명되어 치매까지 겹치더니 얼마 후 돌아가셨다. 설상가상 의지하던 단 며느리마저 할아버지보다 먼저 이승을 떠났다. 아들, 아내, 며느리까지 앞세운 할아버지는 어디에도 기댈 곳 없어 허공을 헤매셨을 터. 손부 손에 수발 받는 그 마음은 또 어떠셨는지.

외롭게 사시던 할아버지는 그래도 졸수(卒壽)를 훨씬 넘기고 돌아가셨다. 그렇게 떠나고 난 뒤 한참 후에야 나는 할아버지의 그 심중을 헤아려 졌다. 뒷방에 홀로 앉아 약주 한 되를 벗 삼아 작은 그릇에 홀짝홀짝 비워 드시던 할아버지. 내 젊은 날은 생활에 치어 뒤 돌아볼 여유조차 없었는데, 이제 새삼 할아버지의 곱상했던 그때 모습이 떠오르면 눈시울이 붉어진다. 흰 무명 바지저고리에 한 모금의 약주를 맛나게 드시던 그 기억들이…

작은 올케는 어머니가 우리 곁을 떠난 후에도 가끔씩 할아버지가 좋아하는 약주며 간식거리를 갖다드렸으나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어버이 살아 신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닳다 어이 하리/ 평생에 고쳐 못 할일 이뿐인가 하노라.’ 송강 ‘정철’의 시 구절처럼 때늦은 회한에 가슴이 아리다. 예전 아궁이에 불 때고 밥하던 시절에도 부엌 시멘트 바닥에 깔고 앉을 방석은 할아버지가 볏짚을 꼬아서 만들어 주시곤 했는데.
 
송산동 친정집엘 가봤다. 행여 할아버지 멍석이 남아 있지 않을까 해서다. 수많은 세월이 흘렀으니 당연히 멍석도 낡고 헤어져 폐품으로 사라지고 없으리라 여겼다. 헌데 할아버지의 멍석은 긴 세월을 돌돌 말아 안은 채 두 개나 세워져 있었다. 반가웠다. 그리움을 간직한 영혼인양 한 세기가 훨씬 지났는데도 할아버지의 멍석은 그렇게 거기 남아 있었다. 질부는 “고모! 멍석 필요하시면 하나 가져 가십서!한다.”
“그래! 나중에…”
하고는 발길을 돌렸다. 저며 오는 가슴이 왠지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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