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1958년 17세때.
 

 

제주에서는 4·3 사건이후 군부대의 민폐가 아주 심했었다. 아버지는 한 고을의 수장으로서 힘없는 민초들의 아픔을 달래려 했고 잘못 된 것을 바로 잡기위해 부단히 노력 했다. 그것이 그들에게는 눈에 가시였다.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고, 내무부 치안국의 통첩을 받은 제주도 경찰국은 요시찰인 및 특히 지식인을 검거하라는 예비검속이 하달 된 것이다. 그해 7월 중순경, 아침에 출근한 아버지는 그날로 돌아오지 않았다. 법이 실종된 시절이라 당시의 근거는 아무데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예비검속으로 아버지가 행불이 되신 후 어머니는 풀어야 할 숙제를 가슴에 안고 살았다. 내가 고등학교 일학년 때인 어느 봄날 아침,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자구리 바닷가로 갔다. 소남머리와 자구리 사이에는 높은 언덕바위가 있다. 우리는 그 바위 너머 소남머리 남서쪽인 바닷가로 내려갔다. 어머니와 나는 허리까지 차오르는 바닷물 속으로 들어갔다. 어머니는 하얀 광목 적삼을 펴들고 아버지 이름을 목 놓아 부르는 것이었다.

“예~ 헌저 옵서! 옵서 가게~”를 몇 번이나 되풀이 하고는 흰 적삼을 가슴에 안았다. 그날은 아버지 비석을 세우는 날이었다. 아버지 시신이 없어 무덤을 만들지 못한 것이 늘 한이었던 어머니는 그 옷을 비석아래 묻었다.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는 스님의 독경소리에 가슴에 쌓였던 숙제를 풀었다는 감회의 눈물을 얼마나 많이 흘렸을까. 그렇게 해서 아버지 비석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볼 수 있도록 지금의 서귀포여고 앞 길 건너 북쪽에 세웠다. 

아버지 비석에 새겨진 비문(碑文)을 여기에 옮겨본다
 
아! 여기는 서귀면장 강 성모(康 成模)의 넋을 모신 처소이니 자(字)는 양훈(良訓)이요 아호는 一心이며 관향(貫鄕)은 신천이다. 법환리에서 태어나 문학에 뜻을 두어 이를 실천하고 일찍이 서귀면 협의원(協議員)을 역임하다 아! 세상의 정도가 국가를 좀먹고 백성을 병들게 하는 무리가 악행을 저지르자 그는 이에 비분강개(悲憤慷慨)하여 민주 이념(民主 理念)을 가지고 만회하려고 힘썼다. 경감으로 제주도 감찰청 보안과장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위원회 제주, 황해, 양도 지구 사무국장 겸 조사관등의 직무에 취임, 백성들의 이익을 도모하기 위하여 옳고 바른말로 할 말을 다하니 아는 사람들은 거의가 그는 못된 때를 만났다고 이르더라. 7월 16일 원인도 모르게 이승을 떠나니 향년 四十四세였다. 어찌 하늘을 원망하랴!
지금 세상에 다시 그를 못 보게 되었으니 그 비통함이 그지없더라. 아버지를 또 뵙고 사모할 수 없어 바다에서 초혼(招魂)하고 일주도로 북쪽에 묘소를 대신하여 단소를 마련하여 그의 의관을 묻어 추도비(追悼碑)를 세우려 하였다. 이에 서귀면민들이 한 결 같이 애도할 뜻을 말하며 불후지사(不朽志士)를 도모하고자 나에게 와서 그 사적(事蹟)을 적어 달라 하길래 나는 그 애통함에 감읍(感泣)되어 마침내 사양 할 수 없더라.
(중략)

본시 행장(行狀)을 상고(詳考)하건데 오직 一心은 강직한 성품에 기대어 한 결 같이 두려워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아 험란(險難)하고 변전(變轉)된 생애(生涯)는 불행하게도 서거함에 이르렀다. 그러나 충간의 담으로 들끓는 여론이 하늘에 솟구쳤으니 죽어서도 후회하지 않으리라. 나의 문장이 비록 간략하다고 할지라도 유명(幽明)의 한과 저승의 영령(英靈)을 풀어드려 적을 것을 적어 베풀었으니 님이여! 영세에 편안하소서.
 
비문을 적어주신 분은 강 두환 선생님이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그 비문을 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로부터 십여 년 후 어머니도 돌아가시고, 아버지 비석은 언제나 거기 그곳에 남아있으리라 여겼는데 어느 날 법원에서 고소장이 날아들었다. 밭주인으로부터 비석을 옮기라는 이유였다. 그 곳에 아버지 비석을 세울 때만 해도 일주도로 옆(비석 맞은편)에는 서귀포 여고가 없을 때였다. 아버지 비석을 세우기 위해 어머니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고심을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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