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은영 시민기자의 ‘나의 삶, 나의 추억’

비석을 세우기 전 그 터는 아무 쓸모가 없던 빌레였다. 당시 주인은 그냥 무상으로 쓰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그럴 수는 없다며 그에 합당한 금액을 지불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주도로 옆 그 터는 기껏해야 십여 평 정도나 될까. 농사를 지을 수는 더더욱 없는 땅이었다. 당시 어머니는 상대방에게서 증서를 받았다는데, 큰오빠가 돌아가시고 그 영수증은 찾을 수가 없어서 이런 일이 생겼던 것이다. 그 터 값을 지불할 때 심부름(중간역할)을 했던 사람도 지금은 모른다고 했다 한다.

어떤 방법으로 회유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귀신이 있다면 내 어머니가 무덤에서 벌떡 일어나 “이게 무슨 일이냐!”고 호통이라도 칠 법 하련만…
아버지의 시신을 찾을 수가 없어 무덤 대신 비석이라도 세워야겠다는 것이 어머니에게는 생전의 숙원이었기에, 억울하게 가신님의 혼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인데 어찌 그것을 무상으로 점령(?)할 수가 있었겠는가. 아픈 그 넋을 위로하기는커녕 법적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그 여인(본래 땅주인의 며느리)은 땅을 빼앗아 버렸다.

인면수심(人面獸心)이 아니라면 이럴 수는 없는 법이다. 인생 팔십을 넘기고 구십을 바라보는 오氏여인의 노욕(老欲)앞에 할 말을 잃었다. 평소 그 여인은 어머니와도 잘 아는 사이었고 그의 부모도 내 아버지의 사연을 너무나 잘 아는 이들이었다. 그의 남동생들 역시 내 오빠들과는 친분을 나누는 사이였는데, 인간의 욕심에는 안면을 바꾸는 그 여인의 행태에 오히려 연민이 느껴졌다. 이제 증인을 해줄만한 이들도 다 고인이 되었으니 결국 증거 불충분으로 패소하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아버지 비석을 가족묘지로 옮긴 것이 어느새 수년이 흘렀다. 상처가 겨우 아물어 갈 즈음 다시 또 그 상처에 소금을 뿌린 격이 되어 그때 덧난 상처가 아직도 아리다. 그 후 비석을 어디로 옮겼는지 궁금해 하는 하는 이들이 많았다.
또 다시 사월이 돌아왔다. 제주사람이면 단장(斷腸)의 슬픔 없이는 회고할 수 없는 계절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산방산 앞으로 차를 몰고 간다. 구멍이 숭숭 뚫린 돌담 안에 가득 핀 유채꽃을 보노라면 온몸에 전율이 인다.

어느 날, 영문도 모른 채 불귀의 객이 되어버린 수많은 민중들의 응어리가, 사월이 되면 꽃으로 피어난 그 함성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물결치는 것만 같아 눈시울이 뜨겁다. 그네들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 고왔던 모습들은 속절없이 스러졌어도 계절이 돌아오면 다시 샛노란 불꽃으로 피어나는 그 넋은 영원히 살아있을 터.
극심한 이념 대결과 무력 충돌의 진압과정에서 수많은 양민들이 까닭도 모른 채 희생되었으니 제주 4·3 사건은 불행했던 시대가 낳은 산물이다.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목숨을 빼앗긴 이들과 그 자손들이 겪는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생각한다면, 4·3 사건은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맞서 싸운 저항사가 아니라 제주도민의 수난사다. 4·3의 체험도 없으면서 자기주장만 관철하려는 젊은이들과 편중된 지식인을 중심삼아 활동하는 운동가. 4·3을 흥미위주로 이끌어가며 왜곡된 묘사를 일삼는 예술가들. 그때의 범죄를 잊어버린 체 참회하지 않는 양심의 불량자들이 역사를 왜곡하고 편당으로 이끌려서 불화의 씨앗이 되어서는 안 되겠기에 아직도 안타까움이 인다.

저작권자 © 서귀포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